아픈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합니다. 병실에 들어서면서 그곳에 계신 분들에게 인사하면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제를 보고 기뻐하고, 어떤 이는 놀라고, 어떤 이는 무관심합니다. 하지만 아픈 이는 모두 관심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마치 나병환자와 같습니다. 소외되고, 절망하고, 몸과 마음으로 무기력을 느끼는 나병환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느낌에 전염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아픈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합니다. 아프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그들은 정상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스스로를 부정하다고 느끼기에 격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도 나병환자를 오랫동안 배척해 왔습니다. 한센병이라고도 하는 나병은 나균에 감염된 피부와 말초신경이 면역질환을 겪게 되는 병인데 이 때문에 감각을 상실한 손과 발, 코 등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기에 일찌기 사람들은 나병을 천벌로 여겼으며 나병환자를 문둥이라고 불렀습니다. 문둥이가 어린 아이들을 잡아서 약으로 먹는다는 말은 이들을 사회로부터 소외, 격리시키기 위한 비인간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저는 신학생일 때 이청준 씨가 쓴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설은 나병환자들이 소록도에서 갇혀 살면서 느끼는 인간 이하의 삶과 그들의 절망과 희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을 덮자마자 무작정 소록도로 갔습니다. 그날 저녁 소록도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는데 옆에서 기도하던 분이 손에 들고 있던 묵주를 떨어뜨렸습니다. 그것을 주워드리려고 손을 뻗는데 그분의 손도 함께 내려왔습니다. 그때 보았습니다. 손가락들이 떨어져 나가 흉측하게 변한 손을! 그 뒤 미사내내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평화의 인사를 할 것인가 생각하며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요즘 나병은 치료할 수 있는 병이 되어 거의 없어졌지만 저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그것을 봅니다. 현대판 나병환자와 같은 에이즈 환자,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노숙인, 범죄자 등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 접촉을 꺼려합니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우리는 익명의 다수 집단에 소속되어 안전함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상종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언제나 부정적이고 이기적이고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을 우리는 나병환자처럼 대합니다. 언제나 자기 것만 챙기는 가족 중의 한 사람, 자기 자랑만 일삼는 친구, 언제나 불평불만을 늘어 놓는 직장동료를 피하며 소외시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나병환자처럼 취급한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를 치유하기 위해 손을 대면 더 이상 드러나게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야 함을 아시면서도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에 대한 연민 때문에 기꺼이 그를 치유하십니다.
만남과 접촉, 연민이 없으면 치유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소외와 격리는 사람을 낫게 하지 않습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만질 때에야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치유는 환자만이 아니라 손을 대는 사람에게도 일어납니다. 소록도에서 처음으로 나병환자를 만난 뒤, 신학교에서 릴리회에 가입하여 칠곡가톨릭병원의 나병환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목욕시켜 드리며 그들을 처음으로 사람으로 만나게 되었고 내 안의 나병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아픈 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몸과 마음으로 아픈 사람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부정하다고 느끼며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사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도 치유를 베풀어주십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우리의 나약한 몸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병든 마음까지 깨끗하게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치유된 이를 가족과 공동체에게로 돌려주십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함께 하는 아픈 형제 자매들을 위해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이들을 어루만져 치유해 주시기를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