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총무원장이던 설정 스님이 숨겨둔 자식과 학력위조, 거액의 사유재산 문제 등으로 조계종의 국회와 같은 중앙종회에서 조계종 역사상 처음으로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었습니다. 결국 설정 스님은 자진사퇴했지만 중앙종회는 불신임을 가결했고, 조계종은 개혁을 원하는 스님들과 기존 권력을 유지하려는 스님들 사이에서 큰 갈등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장로교회인 신도 10만명의 명성교회는 세습문제로 시끄럽습니다. 김삼환 원로목사는 아들인 김하나 목사에게 명성교회를 세습했고, 이것을 예수교 장로회 통합에서 적법하다고 판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예장에서는 교회 세습을 법적으로 금지했고, 명성교회에서도 이를 따르겠다고 했기에 파장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인 불교와 개신교의 이같은 모습을 보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종교에 실망하고 권력과 돈에 매몰된 종교계에 ‘이게 종교냐?’하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한국 종교계의 문제는 비단 한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는 지난 70년간 6개 가톨릭 교구에서 1,000명 이상의 아동이 300명 이상의 가톨릭 성직자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천주교만이 아니라 가톨릭 전체에 충격이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례적으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에게 메시지를 발표하고 회개와 쇄신을 촉구하였습니다.
이같은 사태들을 보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 종교인에 대한 반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가 세상의 어둠을 덮고 부패한 소금으로 변질된다면 과연 이 세상에 종교가 필요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사제로서 제 마음은 무겁고 죄송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질문이 더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불의와 실망을 안겨주는 종교를 떠나고 싶은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종교인들을 떠나고 싶은지, 혹은 그냥 떠나고 싶은지 묻고 계신 것 같습니다.
교회나 신앙공동체는 전통적으로 배에 비유됩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되어 있으면 안전하겠지만, 항구에 머물기 위해 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교회와 종교인들은 안전한 항구에서 호위호식하며 배의 본질을 망각했습니다. 닻에는 이끼가 끼고 돛은 해어지고 있지만 배 안의 사람들은 그저 안전과 편안함만을 위해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썩고 병들고 문들어진 것입니다.
배는 광활한 바다로 항해해 나갈 때, 풍랑에 맞설 때 그 가치가 드러납니다. 배가 있을 곳은 안전한 항구가 아니라 위험한 바다이며, 그 배에 닥칠 파도와 역풍은 배가 더 먼 곳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안전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배를 유지하고 항해의 규칙을 배우는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광활한 바다에 대한 열정, 더 멀리 항해하려는 갈망, 항해에 대한 열의를 살려야 뱃사람으로 새로 날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폭풍에서 빼내주시도록 기도하지 않고 그 폭풍을 견디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십자가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종교가 아니라 신앙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종교는 우리가 우리의 척도에 따라 하느님을 만드는 것이라면, 신앙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척도에 따라 만드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종교에 대해 느끼는 실망과 반감은 우리 자신이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 될 때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인으로 우리의 척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척도에 따라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가지치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나무를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 튼튼한 나무로 자라도록 하기 위해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내야 할 때입니다. 나무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나무가 나중에 부유해 질 것을 믿는다면 가지치기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필요한 관행을 없애고 복음정신에 위배되는 일을 포기하고 다시 본질에 충실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기 원하는 변화는 우리가 먼저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세상에서의 성공, 신자 숫자의 증가, 교회 사업의 번창, 더 많은 사제와 주교를 만들어 내는 일과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동안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찾아 온 우리에게 주님이 아닌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해 왔습니까? 돌아서야 합니다. 슬퍼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적인 문제 해결에 너무 치중해 왔습니다. 눈 앞의 문제에만 매달려 잠시 왔다가는 우리 삶의 본질을 잊고 살았습니다. 육에 갇혀 있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과 생명을 잊고 지내왔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 더 직접적이고 더 확실한 것으로 대신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며 그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예수님의 물음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실 얼마나 많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떠나고 싶으셨을까 반성합니다. 우리의 이기심, 죄, 나약함을 앞에 두고 우리를 인내하고 받아들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이 먼저 반성하고 통회하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 그동안 주님을 떠나 있었던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동안 주님 아닌 다른 것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바쳤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제는 주님을 떠나지 않으며 당신이 보여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우리의 사랑으로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시옵니다. 당신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