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빨강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 올라서니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스물 여섯 성인이 우리를 맞이한다. 오직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잡혀 귀를 잘린 채 수백킬로를 걸어서 온 스물 여섯 성인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목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배고픔과 목마름, 추위와 상처 때문에 오히려 죽음의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것이 기뻤던 그들 가운데에는 열 두 살된 루도비코도 있었다. 잔혹한 십자가 형을 당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8개월이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나가사키에 오고 가는 외국인 배들이 니시자카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스물 여섯개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후에 신자들은 그 자리에 빨간 동백나무 스물 여섯 그루를 심었다. 선연한 피빛으로 피었다가 꽃봉우리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나무는 일본 가톨릭 신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2. 흰색
2016년 3월 17일, 일본 신자재발견 151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니시자카 언덕에 일본인 디에고와 조선인 복자 카이요의 순교 현양비가 세워졌다. 서로 국적과 문화는 달랐지만 신앙 안에서 하나된 그들은 감옥에서 만나 우정을 키웠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나아가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들의 신앙을 기억하기 위해 서울대 명예교수 최종태 요셉 선생님께서 조각한 현양비를 나가사키 다카미 대주교님과 대구 타대오 대주교님께서 함께 축복하는 것은 그 상징성을 넘어 보는 이를 감동시켰다. 현양비에 담긴 하얀 조각은 신앙에 있어서는 순수하고, 우정에 있어서는 맑고, 희망에 있어서는 영원한 투명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축복식에 함께 참석한 일본과 한국의 신자들의 노래와 기도 안에서 진심-혼네-이 전해졌다.
3. 분홍
나가사키에서 제트포일로 1시간 넘게 떨어져 있는 고토는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도망쳐 간 곳이었다. 배를 삼킬 것 같은 파도를 헤치며 가면서 이렇게 먼 곳까지 올 수 밖에 없었던 일본 신자들은 농사 지을 땅도 없던 척박한 섬에서 자신들의 손으로 성당을 짓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배를 타고 찾아갈 수 밖에 없는 구 고린 성당에서 신자 할머니 한 분이 성지순례 일행을 위해 만들어 내 온 분홍색 찹쌀모찌는 따뜻했다. 이국 땅 외로운 섬에서 내 손에 얹혀진 분홍색 모찌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예쁜지 알게 되었다.
4. 검정
성지순례의 마지막 장소인 우라카미 성당.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우라카미 팔천명 신자들이 순식간에 번제물로 바쳐진 그곳은 나가사키의 심장이다. 250년 박해 기간동안 후미에-예수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짓이겨 밟음으로써 신자가 아님을 증거하던 일-의 고문을 당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감나무마저도 육백도의 화염에 타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신자들은 타버린 감나무 조각이라도 찾아 본당 주보인 루르드의 성모님 앞에 모셔 두었다. 검은 감나무 조각, 그 안에 담겨진 슬픈 진실은 눈물로만 바라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