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아십니까? “상실의 시대”를 쓴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이며, 최근에 가장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이기도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을 쓰는 재능만이 아니라 소설가로서 유명한 마라토너이기도 합니다. 그는 매일 한 시간씩 달리기나 수영을 합니다.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계속해서 달립니까?
소설가로 현대에서 살아갈려면 강고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강고한 의지를 장기간에 걸쳐 지속시키려고 하면 아무래도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러티가 문제가 됩니다. 일단은 만전을 기하며 살아갈 것.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 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인간은 반드시 다른 한쪽에서 날아오는 반동을 받게 됩니다.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오늘 독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야고 4,14-15).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시는데 우리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합니다.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나 수도자가 되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만전을 기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달리기를 합니다. 또한 달리기를 할 때 육체적으로 제 안의 불만을 소진시키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제가 얼마나 약한지, 제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알게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합니다.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 하나는 자신이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 주는 독자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도 자신의 삶이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과 그 의미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신자가 존재한다는 실감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사제나 수도자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사제나 수도자가 되었을까요!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입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티모 4,7)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