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말 미움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는 옷을 찢으며 격분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도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붙잡으러 나갔으니 참으로 미움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진짜 미워한 사람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본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이 먹고 자고 늘 함께 있던 사람이 그를 가장 미워했고, 그를 없애 버리려고 적대자들에게 그를 팔아 넘겼습니다. 그는 미움받는 사람,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고 고통을 받아 그의 모습이 인간 같지 않게 망가질 때까지 미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주님의 종인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우리는 미움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 15,18-19).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미움받고 박해받고 죽임까지 당할 용기를 내는 일입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다면 세상은 우리를 사랑할지언정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기 있는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6). ‘마지막 한 닢’이 무엇일까요? 저는 마지막 한 닢이란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지막 한 닢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한 닢이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을 알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아들러는 “인간이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해와 관련하여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도의 때가 떠오릅니다. 2010년 9월 어느 주일 아침, 누군가가 제 기숙사 방문을 부서질 듯 두드렸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 잠에서 깬 저는 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던 미국 클리브랜드 예수회 대학의 교목실장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이른 아침에 저를 깨운 것은 제가 캠퍼스 기숙사에 살고 있는 유일한 신부이며 교목실 담당 신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급히 옷을 입고 기숙사 식당으로 내려가면서 교목실장은 제게 오십여명의 대학생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 이유는 새벽에 기숙사생 중 한 남자학생이 목을 메어 자살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긴급조치는 취해졌지만 일곱 개 기숙사 각 층에서 학생들을 대표하는 오십여명의 학생들을 위해서 제게 기도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기도 후에는 그들이 각 기숙사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125년만에 처음으로 기숙사에서 학생이 자살한 사건은 대학공동체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달 후에 다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화장실에서 자신의 손목을 그은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만일 그 학생이 이전의 두 남학생처럼 술을 마셨고, 힘이 셌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녀와 대화하면서 그녀가 가졌던 고통과 절망,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려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용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습니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 ‘나는 쓸모없어’ ‘뭘 해도 나는 늘 이 모양이야’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를 너무 낮게 볼 때도 있습니다. 기숙사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사람은 그날 의무 봉사 담당이었던 요셉이라는 학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이 사건을 혼자서 직접 목격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저는 나중에 요셉과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손으로 고를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후에 요셉은 원하던대로 의사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유혹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싶고, 설명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 남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을 어떻게든 나름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이것을 아들러는 ‘무늬만 인과법칙’이라고 했는데,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도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입니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지금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결정하도록 만듭니다.
오늘 엘리야는 하느님께 기도하여 큰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은 제갈공명이 남동풍을 불게 하여 승리한 적벽대전을 연상케 합니다. 엘리야나 제갈공명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실망하지 않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기도와 제사, 그리고 철저한 수련과 세상의 원리와 이치를 열심히 공부했을 것입니다.
삶은 매일매일이 적벽대전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신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지금 여기에 있으며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실존철학자 샤르트르는 말했습니다. 정말 타인이 지옥일 때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고민은 죄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입니다. 어떤 종류의 고민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음을 알려 줍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 욕구를 ‘소속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며 함께 살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더 데레사 성녀는 현대 세계의 가장 큰 병은 나병이나 암이라기보다는 필요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자신이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누구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마더 데레사에게 묻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성녀는 말합니다. “집에 돌아가서 가족을 사랑해 주세요.” 우리는 먼저 곁에 있는 사람을 신뢰하고, 그 사람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오직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립할 수 있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에 소속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러는 말합니다. “사랑하고 자립하고 인생을 선택하라.” 저는 이것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훨씬 오래전에 더 명료한 말로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 준단 말입니까?” 타인 역시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님을 인정합시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에 겁먹지 말고,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타인에게 인정 받으려고 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행하면 됩니다.
인생에 있어 의미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의 삶, 곧 마지막 한 닢을 통해 자신을 인정하고 옳은 삶을 사는 미움받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고, 과거나 운명이 아닌 나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어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미움받을 용기를 내는 것이며, 우리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것, 가장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미워서 죽지 않고 사랑하다 기쁘게 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