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겨울 신학교 4학년을 마칠 때쯤 원장 신부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찾으실 일이 없으실텐데 연락을 받아 의아한 마음으로 원장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원장 신부님께서는 간단하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클리브랜드 유학을 가야겠다. 가겠느냐?” 사실 클리브랜드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예, 가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신학교 선배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중은 절이 익숙해지면 떠난다.”
2003년 6월말에 미국 클리브랜드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을 나온 때는 저녁 10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도시가 대낮처럼 밝아서 ‘내가 이상한 곳에 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8월에 개학을 앞두고 미국 본당으로 2주간 실습을 갔는데 그때 미국 동북부 지역에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특전미사를 촛불을 켜고 봉헌했습니다. 본당신부님과 함께 라디오용 건전지와 얼음을 사기 위해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나요?”하고 물으니, 신부님께서는 ‘당신 생전에 처음있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한 미국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동양인은 저 혼자였습니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수업 시간 내용은 무엇인지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말 한마디 꺼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이유가 있겠지.’하며 믿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무얼 했는지,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 남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하는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익숙한 땅, 가족과 삶의 터전이 있는 곳에서 ‘떠나라!’하고 주님이 불렀을 때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애써 쌓아 온 모든 것이 쓸모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으로 가는 것은 모험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헬렌 켈러를 아시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던 헬렌 켈러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뒤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모험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저도 아브라함처럼, 모험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그것이, 좁은 길로 들어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배경이나 능력이 아니라 ‘믿음’뿐이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 길을 나선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시며 도와주십니다. 클리브랜드 신학대학원에서 일년을 공부한 뒤에 저는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엘살바도르라는 나라에 선교 체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클리브랜드 사제들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신학생들은 여름방학에 그들과 함께 지내며 선교 체험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주간의 새로운 체험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런데 미국 공항 이민국에서 저를 잡더니 다른 사무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클리브랜드 신학교에는 외국 신학생이 저 하나 뿐이다 보니 꼭 필요한 서류를 학교에서 준비해주지 않은 채 외국으로 가도록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민국 사무실에는 이민자들, 얼핏 보아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로 넘쳐 났습니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다가 다음 비행기를 놓칠 것 같아 손을 들고 한마디 하려 했더니 ‘입 다물고 그 자리에 앉아 있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좀 있으니 공항 경찰이 들어와서 제 옆에 앉아 있던 어떤 사람을 수갑 채워서 데리고 나갔습니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무리의 히스패닉 가족이 저처럼 경찰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 왔습니다. 아빠는 짐을 양손에 들고 엄마는 한 아이는 업고 다른 아이는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 옆에 앉았는데 그때 여자 아이가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아이의 눈은 예뻤습니다. 맑았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그 순간 저는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내가 외국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낯선 곳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각자의 고향이라고 생각되는 곳도, 내가 배우고 쌓아 온 것들도 때가 되면 뒤에 두고 떠나야 할 한시적인 것들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낯선 곳에서 그런 이방인의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부르심에 응답해서 결국은 떠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식이 군대에 가듯이, 직장 때문에 정든 곳을 떠나듯이,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아프게 되듯이, 마침내 때가 되면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듯이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지금까지 쌓아온 재산, 남들이 나를 알아주는 것, 나의 건강과 능력, 어떤 것도 정말 필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 주셨듯이 낯선 곳에서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니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준비해 두셨으리라는 믿음,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라는 믿음뿐입니다.
그런 믿음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가져오십니다. 진리의 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고 필요한 것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은, 그래서 자유입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 준 것처럼, 제가 체험한 것처럼, 성령은 우리 삶을 하느님 중심으로 만들고,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은총 속에 머물도록 합니다. 우리 삶이 어려움 중에 있다면 그때는 성령이 더욱 왕성히 활동하는 때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집시다.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믿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부르심에라도 ‘예’하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