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자 씨와 네팔을 여행한 어느 작가가 이런 일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일행이 이름난 관광지에 노점상들 사이를 지나가던 중에 김혜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노점상 여인 옆에 앉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김혜자 역시 그녀 옆에 앉아 말없이 여인의 한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네팔 여인의 눈물은 옆에 앉은 김혜자를 보며 웃음 섞인 울음으로, 이내 밝은 미소로 바뀌었습니다. 헤어질 때가 되자 김혜자는 팔찌 하나를 고른 후 그 여인에게 300달러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놀라서 자기 손에 들린 돈과 김혜자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나중에 작가가 ‘왜 그런 큰 돈을 주셨나요?’하고 묻자, 김혜자가 대답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횡재를 하고 싶지 않겠어요?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잖아요. 그녀도 나처럼 행복하기를 원하고, 작은 기적을 원하고, 잠시라도 위안 받기를 원하잖아요. 우리는 다 같아요.”
그 무렵 김혜자 역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진실한 공감의 능력으로 자신의 아픔까지 치유해 나갔습니다. 공감은 ‘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갖겠다는 선택’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니네베는 요나 예언서가 쓰여질 당시 역사적으로 이미 멸망했기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니네베는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니네베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하느님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곳이라면 바로 그곳이 니네베입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니네베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우리가 머무는 공동체에도 존재합니다. 세상은 니네베입니다. 매일 신문기사나 뉴스를 볼 때, 테러와 난민, 전쟁과 어린이들의 고통, 젊은이들의 불안과 환경오염, 현대인의 병과 중독 등이 니네베의 실상입니다. 이런 니네베로 주님은 우리를 파견합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우리는 예언자로 불리웠습니다. 우리는 요나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멋들어진 직분도, 쉬운 직분도 아닙니다. 예언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 거기에 대답한다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일부분이 아니라 나를 송두리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낯선 사람들에게 가서 헌신해야 하므로 자신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마 나의 능력, 비전, 열성적인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공감,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갖겠다는 선택이 먼저 아닐까요? 그도 나처럼 위로받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니네베의 한 사람이므로 요나는 그 옆에 앉아 같이 울어주고 같이 웃어주는 마음, ‘우리는 다 같아요’하고 받아줄 수 있는 공감의 자세가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