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귀향(Spirits’ Homecoming)’을 보러 갔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 불편한 역사적 사실, 아직도 해결될 길이 보이지 않는 일을 영화로 본다는 것은 판타지와 헤피엔딩의 만족에 익숙한 우리 시대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영화내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몰랐다는 당황스러움이 미안함으로 자라다가 한 소녀의 노래 ’가시리’가 울려퍼지자 붙들고 있던 마음을 놓아 버렸다. 부끄러움이, 미안함이 노래로, 눈물로 터졌다. 그런데 흐르는 눈물의 온기가 위로가 되었기 때문일까,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성공과 자아도취가 우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부끄러움이라니, 이런 약해 빠진 소리를 누가 알아줄까마는 부끄러움이 있어 내 눈물이 그렇게 부끄럽지만은 않았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물도 흘릴 줄 모르는 비정함보다는 부끄러워서라도 울 수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기에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윤동주의 사람됨이 그립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이 살아야 했던 식민지 시대의 처지가 매일 텔레비전에서 보는 폭력과 테러, 희생자의 눈물에도 무뎌진 우리 모습과 대비되어 더 부끄러워진다.
스물 여덟 인생을 살면서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라고 말하던 시인의 마음 앞에서 온갖 것을 누리며 만족스럽게 마흔을 넘겨 살고 있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밤을 새워 우는 벌레처럼 나도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해야 하지 않을까?
맹자는 말했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다.” 부끄러워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겠다.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과 아픔 앞에서 나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미안해 눈물을 흘리면서 부끄러워하고,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역사와 현실 앞에서 치열하게 살지 못하는 나를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서 부끄러워하고,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사람이 된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부끄러워해야겠다.
부끄러움과 함께, 시인의 고백이 위로가 된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아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