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 이레!”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인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이지만 아브라함과 하느님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만 믿고 정든 고향, 가족과 친척,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백살이 될 때까지 자식이 없다가 세 천사의 방문 뒤로 이사악을 얻었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이제 포기한다 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번제물로 바치라니, 하느님은 정말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아브라함은 놀랍게 행동합니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사악을 데리고 사흘을 걸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갑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말없이 걸었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이사악의 질문이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 앞에서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하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은 속으로 울었습니다. 둘은 계속해서 함께 걸어갑니다.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는 칼을 잡고 죽이려 합니다. 그때 천사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며 말립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놀라고 두번째는 생각하게 되고 마지막으로는 감동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느님께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돈이나 건강, 명예도 중요하겠지만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여러분의 배우자,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식을 하느님께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다른 것은 다 내어 주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하나쯤 있습니다. 젊어서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 나이가 들어서는 가족과 건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원하던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직장에서 실직하고 부인과 이혼하고 자식이 죽고 자신이 병까지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지키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소설가 박완서씨가 생각납니다. 한창 소설가로 잘 나가던 시절에 남편을 폐암으로 잃고 석달 후에 서울대 의대에 다니던 아들이 스물 다섯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박완서씨는 일년동안 글을 쓰지 못했는데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 봐, 계셔서 남은 내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도대체 밥이 넘어가질 않았던 박완서씨는 인근 수녀원으로 옮겨 하느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했습니다. “당신이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 해 보라고 애걸하리라.”
하느님의 한 말씀은 들려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밥이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작가는 그게 더 참담했습니다.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 한없이 창피하고 슬펐던 것입니다. 그 후 수녀원을 떠나 막내딸 집에 갔는데 거기에서 탁자 위에 적힌 글을 보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밥이 되어라.’ 그토록 갈망했던 하느님의 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선 먹고 살아라 하는 그 마음으로. 그녀가 슬픔과 고통 중에 먹었던 바로 그 밥이 하느님이셨습니다.
‘야훼이레!’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과 사흘을 걸으면서도 끝없이 믿었던 하느님, 박완서 작가가 목숨을 걸고 덤볐지만 결국 밥이 되어 먹혔던 하느님께서 몸소 마련해 주십니다. 이제서야 우리는 그분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도,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지켜주시는 것도 아니라 먼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내 몸이다.” 이보다 더 한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처럼, 박완서 작가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으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우리도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며 이웃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작은 연습을 시작합니다. 모든 것은 야훼 이레, 그분께서 손수 마련해 주시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