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코를 대고 엎드렸을 때, 사제서품식에서 제대 위에 부복했을 때 그제서야 저는 제가 무슨 결정을 했으며 저는 그 약속을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서품식이나 한국에서 미국까지 온 가족이나 친구들의 축하를 기억하지만 제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은 ‘앞으로 사제로 잘 살 수 있을까?’ ‘나는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고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하고 질문이었습니다.
사제서품식은 한 사람의 평생을 거는 ‘모험’이자 공적인 ‘약속’입니다. 사제서품식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백성 앞에서 사제의 아버지인 주교에게 존경과 순명, 독신, 가난한 삶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교회가 받아들이고 성인들의 도우심을 청하며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 서품식에서의 서약, 곧 약속을 저는 다 알고 했을까요? 9년 가까이 신학교에서 양성과정을 거치며 기도와 학업, 봉사활동과 여러 체험을 통해 서품식을 준비해 왔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평생을 걸고 지켜야 하는 질문에 ‘예’라고 약속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 때 사제로서 사는 삶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면 용감하게 ‘예’라고 약속했을까 하는 질문도 해 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눈에 찌짐이 씌웠을 때에야 사랑하는 나의 반려자와 평생을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대방을 배우자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평생 나를 지켜줄 것 같던 남편은 ‘남의 편’이 되고, 사랑스런 아내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때론 나를 넘어선 은총을 필요로 하는 과분한 일이기도 합니다.
삶은 약속의 연속이며 우리는 그 약속의 증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약속을 살고 있습니까? 나와의 약속, 친구와의 약속, 배우자와의 약속, 자식과의 약속,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한 약속이 힘들고 무거워 벗어나고 싶어할 때도 있지만 약속 없이 우리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약속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각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두려워하지말고 너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풍요롭게 살아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성경의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셨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약속의 증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삶의 증인이며, 세례성사로 그 삶을 나의 삶으로 살아가기로 ‘약속’했습니다. 남들이, 심지어 가족이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명예, 부가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약속입니다. 때론 그 약속의 의미를 다 못 알아들을 때도 있고, 힘겨워 할 때도 많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약속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약속을 혼자서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역시 사제이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사제인 것을 드러내거나 나아가 천주교 신자가 되라고 잘 권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괜히 부끄럽고 나를 드러내는 것 같아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안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건이 저를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십여년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친한 친구가 가족들을 데리고 이민을 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클리브랜드에서 신학생으로 있었는데 거리가 너무 멀다보니 전화 통화만 간간히 하며 지냈습니다. 친구는 이민 와서 정착하는 가운데 한국 개신교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로스엔젤레스의 개신교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새로 오는 사람의 집을 구해 주고 가전제품을 마련해 주고, 이민과 관련된 여러 일을 도와줌으로써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습니다. 친구도 예전에는 종교가 없었지만 미국에 와서 개신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전 거기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2004년 12월 말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 며칠전 12월 26일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발생하여 23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친구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벌하신 것이다.’하고 설교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제게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친구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친구야, 내가 너의 종교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서 빨리 그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후에 친구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가족 모두는 교리반에 등록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때론 우리는 약속의 증인으로 용기를 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하고,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을 이끌어 주어야 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어야 할 때 약속의 증인으로서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증인으로 위증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됩니다. 진리를 감출 수 없고 희망을 숨겨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약속의 증인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켜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하며, 이 일의 증인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도 있겠지만 결혼식에서, 서품식에서 한 것처럼 용감하게 ‘예’라고 대답할 때 필요한 은총은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용기있게 약속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부활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