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미국에서는 섭씨 40도가 넘는 감옥에 수감 중인 죄수들을 위해 에어컨을 설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에어컨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죄수들의 편의를 위해 세금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극도의 고온이나 저온 상태와 같은 잔인한 형벌은 법의 정신에 맞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영복 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보면 여름 징역살이의 어려움에 대해서 나옵니다. “여름 징역(의 고통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미움의 원인이 된다면 그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올해처럼 뜨거운 여름은 그동안 우리가 감추어 두었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아침을 맞이하고 출근할 때, 햇볕이 내리 쬐는 길을 걸으며 땀을 잔뜩 흘릴 때, 식욕도 떨어지고 두통이 심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다시 보게 됩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지, 자신만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당당하고 기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당당하고 기쁘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혹시 소록도에 계셨던 마리안느, 마르가레뜨 수녀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이 두 분은 오스트리아에서 오신 간호사 수녀님이신데 소록도에서 43년간 봉사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 연세가 70세가 넘어 거동이 불편해 지시자 “짐이 되기 싫다”는 편지를 남기고 2005년에 아무도 몰래 조용히 소록도를 떠나셨습니다. 고국에 돌아가서도 고향 사람들은 수녀님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돌아온지 몰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외면했던 나병환자, 곧 한센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 두 분 수녀님이야말로 자신을 낮추고 가난한 이를 섬겼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자신을 낮추고 기쁘게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됩시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서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보다 낫게 여기고 섬깁시다. 더운 여름일수록 자신을 비우고 남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은 자신을 비우는만큼 더 큰 그릇이 됩니다. 나의 비움이 다른 사람을 위한 쓸모있음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비움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비움이야말로 가장 큰 희생, 가장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푸코 성인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면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더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납시다. 그분께서 낮아짐으로써 우리가 높아졌고, 그분께서 상처입음으로써 우리가 나았고, 그분께서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가 부유해졌음을 기억합시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더운 여름, 좀 더 힘을 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인내심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