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옳은 것과 그른 것,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진보와 보수, 죽음과 삶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옳으면 상대방이 틀렸고, 쓸모있는 것은 중요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하며, 정치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으며, 생명을 끝까지 지키며 살다가 마지막에 피할 수 없으면 맞이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으면 상대해서는 안되며, 외국인은 결코 한국인이 될 수 없으며, 죄인과 성인은 어울릴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한 세상과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경건하게 하느님 앞에서 약속을 하고는 지키지 않고, 남을 비판하면서 나도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내가 경멸하는 일을 다시 하게 되며, 남에게 상처주며 또 같은 방법으로 상처받는 것을 계속해서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늘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내가 싫고 이상하고 부끄럽고 쓸모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원론적인 사고의 한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례를 받습니다. 말씀이 되신 사람이 세례를 통하여 죽고 새로 태어납니다. 죄없으신 분께서 요한에게 죄를 씻는 세례를 받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성사로 그분을 통해 죄에서 해방되는 것 뿐만 아니라 죽어야 사는 파스카 신비를 가르쳐 주고자 함입니다. 파스카 신비, 곧 죽어야 산다는 삶의 역설을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시며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에게 세례성사로 말씀하시는 것은 이원론적인 세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틀과 나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시어 우리의 희망이 되신 이유는 그분 안에서 삶과 죽음이 하나되어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부러진 갈대처럼 늘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꺼져가는 심지처럼 남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고 또 그만큼 상처를 받으면서 두려움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가 오늘 고백한대로 참으로 중요한 깨달음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는 빛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 세례가 가져다 준 의미를 나의 삶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자비롭습니다. 나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나는 부서지고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훌륭하고 이타적이고 사랑스러운 인간입니다. 죄에 죽고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아들, 주님 마음에 드는 딸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로서 더 이상 세상의 기준과 사고방식에 갇혀 옳음 아니면 그름, 성공 아니면 실패, 행복 아니면 불행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것처럼, 내 안에서도 똑같은 잘못과 좋은 점이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삶이란 이런 창조적 긴장 상태를 이해하고 역설과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생각해 보면 삶은 균형있고 분명하고 확실한 것보다는 슬프면서도 기쁘고,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이며, 죽으면서 사는 것이 더 맞습니다. 사제로서 저는 슬픔을 안고서도 웃을 수 있는 삶, 곧 죽어야 살 수 있는 파스카의 신비의 긴장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함을 매일 매일 배우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도 나처럼 착하면서도 나쁘고, 좋은 말을 하면서도 나쁜 말도 하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인간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잘 해 준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 못하기도 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미워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역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완벽한 것을 선호하지만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경지보다는 불완전하고 깨지고 상처 투성이인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중력과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야 합니다. 선과 악, 사랑스러움과 역겨움, 남자와 여자, 죽음과 삶이 섞여 있지 않은 진리는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지만, 그런 문제는 더 이상 없으면 좋겠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바로 그 중력 때문에 내가 허공에 떠다니는 비현실적인 천사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넘어지는 그 중력 때문에 일으켜지는 은총을 체험하고,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세례로 하늘이 열린 것은 우리 마음도 그처럼 열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받은 세례의 깊은 뜻을 깨닫고 우리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있도록,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용서하며, 이웃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미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