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란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을 줍니까? 내가 태어난 곳, 자란 고향이거나 혹은 이사와서 살게 된 지역일 뿐인가요?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으며, 정이 든 곳으로 고향을 이야기할 때 공간, 시간, 마음을 분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살았던 장소와 살았던 시간, 잊혀지지 않는 정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대한 감정은 많은 경우 복합적입니다. 나의 가족, 유년시절에 대한 감사와 애정도 있지만 남에 대해 말 많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있는 곳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과 외면하고픈 감정도 들기 때문이죠. 애증관계라고 할까요. 애틋한 마음도 있지만 상처도 있으니까요.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오늘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읽고 나자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알고, 그가 자란 환경, 그 집안 사람들을 아는 것으로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누군가의 고향, 나이와 학력, 직업, 부모를 아는 것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여기서 고향은 고정관념과 선입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출신지역이며, 고향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우물밖을 벗어나지 못한 개구리처럼 우물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불친절하고, 시기하고 뽐내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성내고 앙심을 품고, 불의를 모른채 합니다.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리는 이런 행동은 어른이 되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씀한 ‘더욱 뛰어난 길’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여러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하고, 돈이 있고, 전문 분야에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그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그의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에 갇혀 있는 고향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남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지 않고, 외지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알아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찾는 그는 기꺼이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저 사람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사랑이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사랑이 있는지, 아니면 고향 사람들처럼 여전히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지 말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스스로 천주교 신자임을 자랑스러워 하며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저의 영원한 고향, 제가 돌아갈 곳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제 마음은 영원한 안식을 얻지 못함을 압니다. 설 명절을 맞아 육적인 아버지 집으로 귀향하면서 제게 주신 조상님들과 가족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동시에 돌아갈 고향이 없는 실향민의 아픔과 타향살이의 설움을 겪는 이들의 마음을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영원한 고향을 꿈꿔 봅니다. 더 이상의 아픔, 상처, 시기, 불의가 없는 곳, 사랑만이 가득한 그곳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어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강론을 마치며, 가톨릭 성가 46번 사랑의 송가를 다같이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