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사제피정은 지금까지의 사제피정과 달랐습니다. 그동안의 사제피정은 오전과 오후 한번의 강의 후에 사제 개인의 시간이 주어져서 좀 여유있게 쉬면서 피정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제피정은 콜럼비아에서 온 신부님과 평신도가 ‘새로운 복음화’에 대한 피정을 했는데 거의 연수에 가까웠습니다. 삼십분 강의 후에 바로 삼십분 나눔, 또다시 삼십분 강의에 삼십분 나눔, 잠시 휴식, 그리고 다시 반복, 거기다가 강의 내용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그리고 회개해야 하는가!’하는 꾸중과 질책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사제들끼리 우스개 소리로 ‘주교님들이 함께 하시니 도망갈 수도 없고,’ ‘이제야 신자들의 마음을 좀 알 것 같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은 우리 사제 모두에게 필요한 회개와 은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사제생활 십년을 반성했습니다. 그동안 제 삶은 안락한 자기만족의 삶, 하느님 없는 삶, 사람들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는 바로 그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피정 중에 콜럼비아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브라질 주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 집을 200여 채나 선물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들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가 되어 있었기에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주교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집을 주셨지만 예수님을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저 역시 그동안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아니라 저 자신을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어 그들에게 영적인 상담, 기도, 자선을 베풀었지만 예수님이 아닌 저의 이름을 위해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체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결국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된 사람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회심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그 사랑에 취하게 된 ‘사랑안의 존재 Being in Love’가 되어 살아갈 때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참조 사도 3,6).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