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는 우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고 느꼈을 때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 다음에는 거절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했고, 어떤 이는 다른 일에 더 심취함으로써 잊으려 했고, 어떤 이는 요나처럼 도망쳤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우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제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론 정의의 하느님께서 죄인을 단죄하고 악을 쳐 부숴주었으면 좋겠지만 하느님은 제 맘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우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종종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난 자신을 보고 있으면 그 이유가 또한 하찮은 것이어서 더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아주까리처럼 작은 일에 기뻐하다가도 그 일 때문에 죽기를 자처하기도 합니다. 작은 세계에 갇혀 다른 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오늘 하루의 그늘과 고통을 피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요나는 우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머리로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합니다. 왜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대로 행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따르지 않는지 불평만 쌓여 갑니다.
요나는 우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고통받는 사람, 무지한 사람, 죄인에게 동정의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연민보다는 판단과 정의가 앞서고 따뜻한 격려의 말보다는 강한 채찍의 말을 더 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엄격하고 잘 웃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이기적이고, 무자비하고, 자주 화를 내고 늘 불평하며, 머리로만 하느님을 알고, 나만의 작은 세계에 갇혀 있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동정의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요나인 것만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을 늘 생각하고 살며,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그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넘어지고 깨어지고, 그처럼 속좁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우리와 같은 모습을 가졌기에 요나입니다. 요나의 이름이 뜻하는 ‘비둘기’처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생명을 전하는 도구로서 자신의 사명을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요나입니다. 우리 자신이 잘나고 믿음직해서가 아니라 요나같은 이를 예언자로 뽑아주신 하느님 덕분에 우리는 요나입니다. 평화와 생명을 전하는 요나는 뒤뚱거리면서라도 그 길을 걸어가는데, 그래서 요나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