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낙엽을 하나 들고) 단풍은 아름답습니다. 화려한 색깔을 띄고 한여름 격정을 뒤로 하고 떨어지는 단풍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겠죠? 단풍은 나무가 겨울동안 살아남기 위해 수분을 축적하면서 나뭇잎이 말라 죽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단풍은 더 아름답습니다. 때가 되어 의연히 죽기 때문에 아름답고, 하늘하늘 앞과 뒤를 보이며 조용히 떨어지기 때문에 더 아름답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단풍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기에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생도 가야할 때가 있고 그 때를 분명히 알고 갈 수 있다면 참 은혜로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위령성월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때, 우리 자신의 뒷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때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오십년 혹은 칠팔십년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아니었습니까? 누구도 원해서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했으니 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살아온 날의 기적을 생각하며 오늘은 살아갈 날의 기적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건강, 자식의 성공, 재산, 뜻밖의 행운일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살면 살수록 깨닫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자식, 내 배우자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 인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인내는 세상살이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별 볼일 없는 일상을 참고 견디어 내게 합니다. 인생은 화려한 드라마가 아니라 무료함의 연속입니다. 한때 사랑하였지만 지금은 그냥 함께 사는 배우자를 견디어 내는 것, 특별한 성취감없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 사소한 일로 속을 썩이는 자식을 키우는 것, 골치아픈 일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가 아니겠습니까!
이 가운데에서 가장 큰 인내를 발휘해야 할 대상이 누굴까요? 그것은 배우자도 자식도 이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같지 않은 나의 몸뿐만 아니라 이기적이고 죄많은 나를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 온갖 욕망덩어리이며 시도때도 없이 마음이 변하는 나를 참고 견디는 것이 가장 힘들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참고 견뎌야 할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나의 자식과 배우자를 인내하듯이 그들 역시 나를 인내합니다. 내가 나의 잘못과 죄를 인내하듯이 하느님 역시 나를 용서하고 인내하십니다. 나의 상대방에 대한 인내가 부족할 때, 나를 향한 그들의 인내가 ‘항상’ 부족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좀 더 인내로운 사람, 너그러운 사람,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인내가 이기심과 죄, 죽음을 넘어서 생명을 가져올 것입니다.
나무는 자신의 일부이며 가장 화려한 나뭇잎을 떠나보내며 인내를 시작합니다. 겨울을 참고 견디어 낼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고 봄이 오면 나무는 조금 더 자라나 다시 잎을 틔우고 푸르러집니다.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 넘치게 만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위령성월에 인내를 기도합시다. 나의 가족에 대해 인내하기를, 나의 이웃과 세상에 대해 인내하기를,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인내하기를. 이 모든 것은 이제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인내하며 기도하는 이는 깨닫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모든 것을 얻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인내를 통해 얻게 되는 생명에 대한 희망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