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한번 가는 봉성체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난 달 봉성체 대상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거동이 불편해서 일어나지 못해 예수님을 못 모신 할아버지, 한걸음도 걷기가 힘들어 한달내내 방에만 계셨다는 할머니, 식사를 제대로 못해 살이 너무 빠져 뼈가 살에 부대껴 앉아 있기도 힘든 할머니, 요양원에서 눈만 뜨고 정신이 없는 할머니. 어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어서 죽고 싶은데 왜 안 죽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런 말씀을 들으면 “할머니, 그래도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까지는 힘내서 사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9,25)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소용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이것을 알면서도 다르게 살아갑니다. 얼마전 읽은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이라는 책에 이것에 대해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 행동의 기본적 동기는 자신의 불안을 다스리고 죽음의 공포를 부정하려는 생물학적인 욕구입니다. 인간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을 운명인 세상에서 무력하고 버려진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베커는 말합니다. “이것이 공포의 근원이다. 무에서 생겨나 이름, 자의식, 깊은 내적 감정, 삶과 자기 표현에 대한 고통스러운 내적 열망을 가지는 것, 이 모든 것을 가지고도 죽어야 한다는 것.”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가 어찌나 압도적인지 우리는 이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묻어두려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스스로에게 대책없이 빠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행운이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총에 맞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지어 전쟁 중에도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은 자기 내면의 생리화학적인 유기체적 구석에 틀어박힌 채 자신이 불멸이라고 느끼며, 그에 합당한 영웅적인 체계를 만들어 나갑니다. 개인의 성공, 명예, 인류의 발전, 위대한 일을 통해서 자신의 불멸을 꿈꿉니다.
하지만 결국은 모든 인간이 대면해야 할 진실은 우리가 ‘우주를 담은 신’이면서 동시에‘똥을 누는 벌레’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모순에 대해 대부분의 인간이 선택하는 방법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의 공포를 억압한채 죄책감없이 즐길 수 있을만큼 즐기는 것으로 타협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들도 압니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무엇보다 사납게 뒤쫓으며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만 조금 길고 조금 짧을 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곱살 때 아버지와 형이 대역죄인으로 죽음을 당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더 나아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굶주리며 온갖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 바로 그 믿음 때문이었다면 말입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정양종 아우구스티노와 형 정철상 가롤로가 순교하는 것을 목격합니다.그의 나이 겨우 일곱살이었고 동생 정혜 엘리사벳과 더불어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와 함께 풀려납니다.하지만 가산은 몰수 당했고, 집안에서 사학을 믿는 천주교인이라고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제를 조선에 모시기 위해 북경까지9번이나 걸어갔고, 사제들이 입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1839년 기해박해 때 잡혀서 무수한 고문을 당한 뒤, 9월22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합니다.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운명, 몹쓸 종교 때문에 망한 인생이 아닙니까?
하지만 정작 정하상바오로 자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지혜서가 대신 말해 줍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지혜3,2-3).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이 죽음 앞에서 이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요? 지혜서는 계속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지혜3,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이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안 없이 불안을 버릴 수 있는 용기,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바로 그 피조물성이 창조주에게 의미가 있다는 믿음, 자신의 진정한 무의미함, 약함,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궁극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어떤 창조적 힘에 의해 어떤 설계대로 일어나고 유지되고 영원하고 무한한 계획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이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살아있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갈등과 존재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한 포기, 즉 지고한 힘에 바치는 선물로서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것입니다.여기에서 참된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종교는 자유에서의 영웅적 승리 가능성을 선사하며 인간 존엄의 문제를 최고 수준에서 해결합니다. 종교는 자신의 바로 그 피조물성, 자신의 하찮음을 희망의 조건으로 만듭니다. 인간 조건을 초월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찰해야 하는 지적 관념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정하상바오로가 겪은 경험, 곧 온갖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켜내었던 체험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살아내야 합니다.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공포를 피해 두려움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8,37-39).
바오로의 확신은 바로 한국 순교자들의 확신이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 오직 하나뿐인 하느님의 사랑, 그 확신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