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1일만에 세월호가 돌아왔습니다. 유가족, 미수습자 부모들의 고통은 이 시대의 고통입니다. 엄청난 충격과 실망, 한탄과 좌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세속화와 물질주의의 힘은 갈수록 커져갑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악마의 유혹은 우리 시대의 다른 신, 돈과 물질주의, 곧 네부카드네자르가 만든 것과 같은 금 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희망원 사태는 엄청난 충격과 실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절감합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묻습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Quo vadis, Domine?”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찾고 외치다가 어렴풋이 깨닫는 것은 시련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인내해야만 우리와 함께 고통받고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 때 지옥같은 일분동안 눈물 콧물 침을 다 흘리다가 옆을 쳐다볼 때 위로가 되었습니다. 내 옆에 그도 나처럼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야 어쩌면 내 옆에 있는 사람, 나와 함께 고통받고 있는 이 사람이 주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와 함께 시련과 고통의 불 속에서 걷고 있는 넷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고통받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 속에서 건져주시기보다 불 속에서 함께 걷기를 택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느님이십니다.
넷째 사람,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진리이며, 그 진리가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삶과 말씀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 방향을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진리와의 만남으로 우리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진리는 만남입니다.
여기 열흘 전에 입회한 여러분이나 은경축, 금경축을 앞둔 수녀님에게나 모두, 이 만남은 늘 새롭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신비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칼 라너는 말합니다.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며 신비와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하느님 체험의 본질이며, 이것 없이 외적인 제도와 형식, ‘소시민적인’ 자기만족의 방편으로서 종교 생활만이 남을 때 더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 고통의 신비, 사랑의 신비, 내 옆의 신비와 얼굴을 마주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