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서 기대하는 것과 그 신앙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특히 살면서 ‘왜 나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하느님께 실망한다. ‘왜 하느님은 불공평하신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찌기 욥의 아내는 아무 이유없이 고통받게 된 남편에게 불공평한 하느님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선택하라고 했다. 바로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2,9)는 것이었다. 하지만 욥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두려움없이 아무도 대놓고 묻지 않는 질문을 했다. ‘왜 하느님은 불공평하신가?’
공평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이다. 우리는 은근히 ‘결함 없는’ 세상을 바란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부모님께서 오래 건강하게 사시고, 불의가 없는 세상을 갈망한다. 하지만 곧 그런 갈망이 우리를 실망시킬 것임을 몸소 배우게 된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일, 가족가운데 아픈 사람, 불의로 넘치는 세상에서 어쩔수 없이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배운다.
왜 하느님은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었을까? 혹은 왜 우리는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고 기대할까?
하느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말로 답변하지 않으시고, 강생으로 몸소 우리를 찾아오셨다. 하느님께서 부조리한 세상에 일부가 되셨다. 그리고 불공평한 세상을 십자가를 통해서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불공평하게 저주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엄청나게 불공평한 세상과 놀라운 사랑의 결합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하느님은 불공평하신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 자신도 불공평함의 비극이나 실망에서 면제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하느님께 그것이 비극적 결말이 아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불공평을 몸소 받아 안고 뚫고 나아가셨다. 믿음과 사랑의 힘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에 맞섰고 어둠 속에서 빛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