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이면 긴 시간이죠? 건물도 삼십년쯤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살고 있는 교구청 사제관이 삼십년이 더 되어 배관이 노화, 파손되었기에 지난 삼월부터 어쩔 수 없이 삼개월동안 교구청 사제들 전부가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성요셉공동사제관에서 삼개월동안 살 준비를 하는데 제가 가진 것들이 보니, ‘사제로 사는데 이렇게 많은 짐이 과연 필요한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신학교 때부터 가지고 다녔던 노트와 책을 대부분 정리하고 옷과 신발, 쓰지 않는 생활물품도 모두 처분하였습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더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 먼저 ‘건강’이 있어야 합니다. 아프면 살기가 힘들고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건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활습관을 살펴야 합니다. 먹고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당하게 운동하고 스트레스도 적게 받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생활을 위한 ‘조금의 돈’이 필요합니다. 많은 돈이 아니라 조금은 적게 보이는 돈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사야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건강과 조금의 돈만 있다면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깨닫고 삶의 의미를 찾을 때부터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누구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죽음을 이해하고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으로 그의 삶은 충만해집니다. 이 사랑의 여정에서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어린이를 보고 있으면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고 않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생기발랄함은 한가지에만 집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데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어린이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다른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합니다. 해야 할 일, 지켜야 할 건강, 돈, 명예, 쾌락 등 수많은 우상들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우리는 자주 한가지에만 집중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잊어버리고, 다른 많은 우상들 속에서 헤매곤 합니다.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 곧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은퇴하신 베네딕도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윤리적 선택이나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라면 우리는 다른 것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화려하고 크고 놀라운 것, 곧 지진, 불, 바람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엘리야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오셨습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조용하고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해져야 합니다. 가진 것, 원하는 것으로 가득 찬 마음에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만났던 끌레멘스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회 신부님으로서 저의 영성지도 신부님이셨던 신부님께서는 은퇴하시고 제가 일하던 미국 본당에 들어와 같이 사셨습니다. 언제나 활달하고 열정적이고 유머가 가득했던 신부님께서 폐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을 때 저는 신부님을 찾아뵙기가 두려웠습니다. 신부님과의 과거의 그 좋은 기억이 없어질까도 걱정되었지만 신부님이 폐암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으로 어떻게 투병하실지,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라 선뜻 신부님을 찾아가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저를 보자 너무 반가워하셨지만 이제는 힘이 없어 미사 때 손을 들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제가 어떻게 신부님을 기억하기를 바라는지’ 여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종, 충실한 사제, 그리고 예수회 회원으로!” 그리고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이 마지막 축복으로 제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열흘 뒤에 신부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끌레멘스 신부님을 떠올리면 그분의 단순한 마음, 순수한 마음이 생각나 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순수함과 열정으로 사신 신부님께서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까지 ‘한 분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섬기던 그 모습에서 연로한 한 사제의 모습만이 아니라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젠가 제가 그때를 맞이했을 때, 저는 어떤 말을 마지막으로 남길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가 생각하니 아직은 제 마음이 무겁습니다. 여전히 많은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고, 자주 우상들 사이에서 어린이의 마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희망합니다. 끌레멘스 신부님과 성모님의 도우심, 그리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길을 다다를 수 있기를, 하느님을 주님으로 마지막까지 고백할 수 있기를. 여러분도 그럴 수 있기를 온 마음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