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성목요일 성유축성미사에는 대구대교구 역사상 가장 많은 사제들이 모였습니다. 범어대성당에서 거행하는 첫 성유축성미사의 의미도 있겠지만 그곳에 온 한 사람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정달용 요셉 신부님입니다. 그날 금경축을 기념하기 위해 오신 신부님의 약력은 단 네 줄입니다. 계산성당 보좌신부, 유학, 신학교 교수신부, 그리고 원로사제. 사제생활 오십년을 이렇게 단순하게 살아오신 신부님께서 그날 답사 때 말씀하신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부활’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부활은 옵니다. 부활은 갑니다. 부활은 우리와 상관없이 오고 갑니다. 부활을 맞아들이고 부활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사정으로, 두려움으로, 걱정으로 제각각 부활을 영접하지 못하고 보내기는 아쉬워 인질로 잡고 있기도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갇혀 탄식하는 제자들에게 다가가 묻고, 듣고, 아쉬워하며 꾸짖고, 열심히 설명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 ‘더 멀리 가시려는 듯’ 연기까지 하시며 한없는 인내를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은 겨우 한마디 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제자가 준비되었을 때 스승이 나타납니다. 제자가 진리를 찾고 원하고 알아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저회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매달릴 때 스승이 나타납니다. 정달용 신부님께서 가르치신 철학 역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고 맛들이는 과정이었고, 그 길에서 우리는 신부님을 붙들고 사제생활 내내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드는 것은 훌륭한 제자입니다. 훌륭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제 것으로 삼아 퍼트립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준 믿음과 용기는 훌륭한 제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훌륭한 제자는 스승을 진정으로 만나 자기 것으로 삼은 제자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며, 그 이름과 함께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아름다운 문’을 열어젖혀 가난한 이, 아픈 이, 죄 지은 이에게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잊고 평생에 걸쳐 사제로 헌신하시며 일상에서 가장 소박한 과제를 그토록 성실하게 수행하신 정달용 신부님을 통해 우리는 ‘성실함’과 ‘거룩함’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이제 훌륭한 사제의 그 제자로 우리의 몫을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