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철이 없던 시절에는 내가 가진 능력이 모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나를 위한 세상에서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인기도 얻고 성공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능력을 키우기 위해 좋은 학벌을 얻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가서 돈을 많이 벌면 그것으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으리라 여겼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걸었던 희망의 이름은 나의 능력, 나의 학력, 나의 야심이었고, 한마디로 말하면 나 자신, ‘김/성/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토록 원했던 희망의 이름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취업을 앞둔 시기에 IMF가 나라를 덮쳐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에서라도 열심히 돈을 벌어 내가 꿈꾸던 유학도 가고 성공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중국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돈을 벌고, 흥청망청 그 돈을 쓰는 삶은 내가 바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내 인생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나에 대한 실망에 빠져 절망하였습니다. 내가 찾던 희망의 이름이 나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내가 나 자신을 모든 것으로 선택할 수 없게 되자 구원의 손이 내게로 왔고 용기를 내어 그 손을 잡았습니다. 그분은 실패한 나, 곧 부러진 갈대이며 연기나는 심지인 나를 꺾지 않고 끄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조용히 가까이에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 희망의 이름을 만나서 붙들게 되자 나는 더 이상 ‘김성래’가 아닌 ‘하상바오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더 이상 나의 이름에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내게 오신 그 희망의 이름은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아서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희망의 이름보다는 성공, 쾌락, 명예, 돈, 보험과 같이 화려하고 떠들썩하고 눈에 띄는 이름에 자신들의 희망을 겁니다. 조용하고, 가까이 있으며, 사랑스러운 예수라는 희망의 이름을 일찍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 내음 풍기실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갈증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여한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아우구스티노 ‘고백록’에서)
희망의 이름인 예수는 가장 조용히, 가장 가까이, 가장 사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너무 시끄러운 세상, 너무 분주하고 산만한 세상, 너무 이기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그 이름을 찾지 못하고 아리따운 피조물에 정신을 잃고 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라는 이름을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어떻게 그 이름에 희망을 걸게 되었는지를. 저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적어도 한번은 ‘예수’라는 이름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이름이 세상의 다른 이름들 속에서 빛을 잃었을 뿐입니다.
예수, 그 희망의 이름은 가장 조용히, 가장 가까이, 가장 사랑스럽게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 집 안에 예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당에 예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친구 중에 예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예수가 있습니다. 성당에 가서 예수성심상 앞에서는 기도할 줄 알면서 살아있는 예수를 몰라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집에 예수가 살고 있는데 그분을 예수로 공경합니까? 남편 예수님, 시어머니 예수님, 며느리 예수님, 자식 예수님, 친구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여러분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만나면 ‘찬미예수님’하고 인사합니다. 이 말은 먼저 “예수님을 찬미합시다”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말은 동시에 예수가 예수를 만나서 기뻐서 하는 인사말입니다. 내 안의 예수가 이웃 안의 예수를 만나니 너무 기쁘지 않겠습니까? “찬미예수님,” 곧, “예수님, 반갑습니다. 예수님, 찬미합니다.”입니다. ‘찬미예수님’은 또한 내가 만나는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찬미예수님, 그대 안에 예수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십니다. 찬미예수님, 예수님 이름의 희망을 잃지 마세요.”
예수, 그 이름만이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그 희망의 이름에 우리는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고 매번 성체성사를 통해 그 희망의 이름을 먹고 마십니다. 그로부터 우리가 예수, 곧 희망의 이름이 되어갑니다. 남편에게, 시어머니에게, 며느리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찬미예수님’이 되어 줍니다. 여러분이 바로 희망의 이름입니다. 다 함께 희망의 이름을 불러봅시다.
예수님을 찬미합시다. (찬미예수님!) 예수님 반갑습니다. (찬미예수님!) 예수님 찬미합니다. (찬미예수님!) 그대 안에 예수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십니다. (찬미예수님!) 예수님 이름의 희망을 잃지 마세요. (찬미예수님!) 그대가 예수님이 되길 기도합니다. (찬미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