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0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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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Homilies

비밀 (Secret) (연중 5주일)

현대인들은 바쁩니다. 정신없이 성공을 위해서 아침부터 늦은밤까지 쉬지 않고 일합니다. 경쟁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시사문제에 민감해야 하며 끊임없이 스펙을 쌓아야 합니다. 대인관계를 넓히기 위해 동우회에도 가입하고 자기계발을 위해 취미활동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방학도 없이 학원을 너대갯씩 다니고 선행학습을 하며 미래의 대학과 직업을 준비합니다. 모두가 정말 눈코 뜰새없이 바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하루 역시 정말 바쁩니다. 하루종일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르친 뒤에 좀 쉬기 위해 시몬의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어서 병을 고쳐줍니다. 해가 지자마자 안식일이 끝났고 기다렸다는 듯이 온 고을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갖가지 질병을 앓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는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썼겠습니까? 새벽녘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갔고 긴 하루의 피로가 몰려옵니다. 다음날을 위해 잠시 눈 붙힐 시간이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현대인들과 예수님 모두 정말 바쁘게 삽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찾는 사람이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쁜 현대인들과 예수님의 다른 점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한 아프리카의 탐험가가 미지의 지역을 탐험하는 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엄청난 장비를 옮기기 위해 원주민 짐꾼을 모집했는데 품삯을 높게 제시했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짐꾼들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이 되자 짐꾼들이 한 걸음도 내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긴 독촉 끝에 한 사람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저희는 계속 갈 수가 없습니다. 영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뒤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온 국민이 정말 열심히 바쁘게 일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영혼이 물질적 성장을 뒤따라오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 부유함과 편리함을 누리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제가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신부님,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쉼없이, 성찰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정말 바쁘게 살았습니다. 지난 주일 미사를 세대 봉헌하고 청년회 특강을 한 뒤 1대리구 보좌신부님들과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연수를 떠났습니다. 강원도 양양에서 동기 군종신부님과 함께 새벽까지 친교를 나누었고, 그 다음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신부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이틀을 보내고 돌아오니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했습니다. 쉬고 싶었고 그것은 잠을 자야된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틀렸습니다. 조용히 촛불을 켜고 방 안에 앉아 묵상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쉼이란 ‘완전히 다른 분’과 만남으로써 정신없는 나에게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더 평온하게, 더 걱정없이, 더 사심없이, 더 침착하게, 더 균형있게, 더 믿을 수 있게, 더 깨끗하게 변화하는 것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정신없이 보낸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자신을 다시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을 때도 흔들림없이 당신이 갈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나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정말로 찾고 있다면, 우리를 정말로 원한다면, 거기다가 내게 재능과 비전이 있다면 우리는 쉽게 인기와 성공에 집착할 것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는다”는 말에 나서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온 정치권이 안철수 씨를 대통령 감으로 찾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실상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인기와 성공,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매인 종으로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집착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바로 특정한 사물이나 사람이 없으면 행복해 질 수 없다고 믿는 감정의 매달림이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돼지와 같습니다. 오늘, 한 주간, 한달을 정신없이 사는 사람은 언젠가 욥처럼 말할 것입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욥 7:1-7).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안에서 쉬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수많은 실패와 불행 속에서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사탄은 내가 실패할 때마다 ‘이제 너는 끝장이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실패할 때마다 ‘이번 실패를 거울 삼아 더 큰 일에 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도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들어 하느님께 향한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를 하였던 링컨이기에 노예해방과 자유를 가져온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지금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됩니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집착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됩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기도 안에서 완전히 다른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것임을 깨닫고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듬뿍 느낀 사람만이 자신을 사랑할 힘을 얻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세계에서 6천만명 이상이 관람한 세계적인 마술사 하워드 서스틴의 공연에 대해 ‘무엇이 그런 성공을 가져왔느냐?’하고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무대에 오르기 전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합니다. 나는 관객들을 사랑한다. 내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니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 만나게 될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쁜 현대인과 예수님의 차이이며 예수님 성공의 비밀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경계를 뛰어넘어 (해외원조주일)

부도덕한 현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사람들은 ‘나꼼수’와 같은 프로그램에 열광합니다. 그것은 답답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풍자프로그램이 권위조차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은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과연 무엇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일까요? 그것은 경계를 뛰어넘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드러내 보여줄 때, 누구나 알면서도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때, 사회적 편견과 관습을 뛰어넘어서 가르칠 때 그것은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거기에 권위는 사람들이 줍니다. 그 새로운 가르침이 진리이고 그 가르치는 사람에게 진정성과 사랑이 있으면 그 가르침은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서 진리와 진정성을 깨닫기에 권위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가르침의 새로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심에서 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행동, 거룩한 회당에서 모두가 외면하는 더러운 영과 마주하는 용기가 사회적 편견과 관습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이처럼 사람을 사랑하기에 행해지므로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 곧 경계를 뛰어넘는 가르침입니다.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곳으로 1992년 LA폭동이후 소수민족간의 적대감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빈민가의 한 고등학교에서 선생님 한명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히스패닉계는 흑인들과 결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중국인들은 배타적이고, 캄보디아인들과 베트남인은 결코 남이 자신들의 영토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곳에서 백인들 역시 소수민족입니다. 학교 교실은 바로 그들의 새로운 영토이며 긴장과 반목이 끝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Line Game, 선넘기 게임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모두가 선의 한걸음 뒤에 서 있다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 나오면 선 앞으로 다가서는 게임입니다. 먼저 선생님이 묻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모두가 앞으로 나옵니다.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모두 키득거리면서 앞으로 나옵니다. “혹시 총질을 당해 본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세요” 갑자기 놀란 학생들이 머뭇거리며 대부분 앞으로 나옵니다. “총기 사고로 친구나 가족 가운데 한명이라도 잃은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 서 계세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두명을 잃은 사람은 그 자리에 서 계세요.” 몇몇은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명이상 잃은 사람?”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는 학생들. 그제서야 학생들은 처음으로 같은 반 학생들을 다르게 보게 됩니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이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폭력의 희생자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합니다.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은 이렇듯 강력합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붉은 악마로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응원할 때를 기억합니까? 그때 우리는 세대와 성, 지역과 이념의 경계마저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레드 컴플렉스 역시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으로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제게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에서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가운데에서 어느날 우리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급식소를 찾아갔습니다. 백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 와서 한끼를 배부르게 먹고 남은 밥을 그 다음날들을 위해서 얻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기쁜 마음으로 홈리스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밥과 국을 정성들여 퍼 주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게 받았고 기쁘게 먹었습니다. 우리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행복하게 먹는 사람들을 보며 뿌듯했습니다. 식사가 마칠 때쯤 사랑의 선교회 수사님께서 기타와 드럼을 들고 나오더니 우리보고 노래를 불러줄 수 있냐고 청했습니다. 갑작스런 청이라 당황했지만 기타와 드럼을 들고 우리는 아는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 할머니들이 땅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어느새 그들 가운데에서 수십명의 사람들과 함께 몸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급식소는 잔칫집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왜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환영받고,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 모두가 기쁘게 춤을 추는 곳, 더 이상 배고픔과 슬픔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가장 인간적인 춤을 추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주는 손과 받는 손은 없고 춤을 추면서 마주 잡은 손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라 한 형제자매가 되고 보니 가난과 인종의 경계는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나와 같은 이웃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은 해외원조주일입니다. 오늘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해 2차 헌금을 하고 그 돈을 해외원조 사업을 위해 사용합니다. 과거 6/25를 통해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처지에 있을 때 우리는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먼저 묻고 싶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누가 해외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그냥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주머니에서 천원이나 오천원을 꺼내 2차 헌금 바구니에 넣는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의 몫을 다한 것일까요?

해외원조는 우리나라 밖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와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안과 밖, 나와 너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새롭고 권위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북한에서 독재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리 동포들, 볼리비아와 아프리카에서 선교하고 있는 우리 교구 사제와 수도자들을 보며 도움을 바라는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입니다. 몇 년전 볼리비아에 있는 동기신부를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 역시 워낙 가난한데다가 정치적으로 부패해서 사람들은 하루 천원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신부님이 사목하는 공소에 한국 개신교회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 전부를 모아놓고 종이를 하나씩 돌리더랍니다. 종이에 자기가 필요한 것들, 예를 들어 냉장고나 선풍기 등과 같은 물품을 적어서 내면 한국에 있는 개신교회에서 사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저하면서도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 준다는 제안을 마다할 수 없어서 대부분 무엇이라도 적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물질적으로 미디어를 등에 업고 선교활동을 하는 한국개신교회를 볼리비아의 어느 시골에서 보면서 우리 신부님들의 고생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삼십대 초반의 열정을 가진 우리 신부님들은 개신교 목사님들 다하는 골프칠 시간도 없이 두서너시간 떨어진 도로도 없는 공소로 신자방문을 다니고, 삼년만에 한번 나오는 한국 휴가때는 그곳 본당신자들을 위해서 모금활동을 하다가 다시 돌아가곤 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저는 해외원조가 저 멀리 있는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동료와 형제 자매를 보살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경계를 뛰어넘을 때 그것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못 사는 사람들 역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바로 해외원조주일의 의미일 것입니다.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된 인류, 진리와 사랑으로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실천할 때가 왔습니다.

 

모든 것은 타이밍 (연중 3주일)

모든 것은 타이밍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 때를 알아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그때 바로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때 바로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 바로 그 결정을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인생이 바뀐 것도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꼭 필요한 때에 정확한 행동과 결정을 할 수 있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연은 때를 잘 알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새들이 울고 제철이 되면 꽃이 피어납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제때에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자연스럽게 흘러갑니까? 사람에게도 제때가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아볼까요? 실은 우리는 각자의 때와 시간을 찾아 나섭니다. 화답송의 말처럼,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소서”하며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준 소명을 찾아나섭니다. 그것을 부르심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커서 무엇이 될래?’ 하는 질문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들어왔습니다. 과학자, 대통령, 유명한 운동선수 등 많은 꿈을 꾸다가 저는 중학교 2학년때 갑자기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성당은 중고등학생이 200명도 넘는 아주 큰 성당으로 주일학생미사 중이었습니다. 저는 옆에 있던 친구와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신부님 강론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뒤에 있던 친구가 ‘어서 손을 들어’하고 말하는 겁니다. 영문도 모른 채 손을 들자 강론대의 신부님께서 저보고 ‘일어나라’ 고 하시더니 신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사제성소를 꿈꾸는 학생이 있습니다. 여러분, 격려의 박수 부탁합니다.” 미사 시간에 갑자기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기 시작하니 전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자 친구와 선배들이 저보고 “네가 신학교 갈려고 생각하는지 몰랐다”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나도 몰랐다’하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있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예비 신학생이 되고 보니 사제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했고 그리 나쁘지는 않은 듯 했습니다. 그렇게 예비 신학생 피정도 가고 관심도 많이 받았지만 제 길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등학생 때 대학시험을 준비하면서 신학교를 가겠다는 생각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을 한때의 호기심 정도로 여겼고,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서 경험을 쌓고 결혼해서 자식도 낳아 기르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부르심을 느꼈지만 응답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반대학을 들어가서 재미있게 잘 지냈습니다. 동아리/학생회 활동, MT도 가고 동문회 페스티발에도 갔습니다. 거기다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도 느끼다가 군대에도 다녀왔습니다. 유럽으로 어학연수와 배낭여행도 갔다왔고 여자친구도 있었습니다. 졸업하면 선배들처럼 대기업에 취업해서 직장생활을 할 준비도 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갑자기 IMF가 터졌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의 국력이 반쪽이 났습니다. 구제금융이 시작되고 기업이나 개인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찌되었든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졸업반이 되었으니 취업은 물건너 갔겠죠! 다행히 중국말을 할 수 있어서 중국에 공장을 둔 한국의 중소기업에 취직했습니다. 외국생활이 힘들겠지만 몇 년 일하면 돈을 제법 모을 수 있을테고 그 돈으로 결혼도 하고 외국으로 유학가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계획은 사람이 세우고 그것을 이루어주는 분은 하느님이라고 했던가요? 제 계획은 금방 위태로워졌습니다. 중국에서 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장시간 노동, 문란한 음주와 기업문화, 중국 노동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덮치자 저는 도망치고 싶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와 제 삶을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내 인생이니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내 배만 채우고 살고자 했던 지난 이십 육년이 보였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처럼 평생 고기만 낚으며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살고 싶었던 게지요. 그런데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주일학교때 학사님이셨고 그때는 이미 신부님이셨던 분께서 제게 “신학교 갈 생각이 없니?”하고 물으셨습니다. 그제서야 십년전의 성소의 부르심이 떠올랐지만 나처럼 무능력하고 실패한 사람은 거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처럼 박수치는 사람도 하나도 없었고 부모님들 역시 반대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평생 고기만 낚으며 내 배만 채울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낚는 일을 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 것인가, 평생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바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인가, 사십일이 지나면 무너질 니네베와 같은 현대세계에서 회개하지 않고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와 함께 광야로 나갈 것인가 결정해야 했습니다. 때가 찼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때론 부르심을 듣고도 못 들은 체 하거나 무시하면서 도망치기도 합니다. 자신의 계획에 훼방놓는 하느님께 화를 내면서 요나처럼 하느님을 피해서 달아나 보지만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입니다. 또 어떤 이는 바오로 사도처럼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있다가, 이것부터 먼저 해 놓고 부르심을 생각해 볼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르심은 갑자기 닥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고기 잡는 일에서 사람 낚는 일로 갑자기 불리움을 받은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부르심은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신앙은 자신의 능력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력함에서 하느님의 전능으로 건너가는 신앙인은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사람에게 때는 왔습니다. 때가 찼고, 바로 그때가 지금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어느날 내가 준비되었을 때 할 것도, 모든 상황이 다 충족될 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뜻하는 라틴어 credere의 어원은 마음인 cor와 주다의 dare가 합해진 말로 ‘자신의 마음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을 사랑이신 하느님께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 아래 지금 이 자리로 인도되어 왔고, 제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연이라 부정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 하느님 말씀을 갈망하고 있는 여러분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때가 찼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곧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주십시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알려줄 것이고, 여러분의 인생에 때가 찼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기에서 사람으로, 이기에서 이타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부르심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연중 2주일)

그리스도인 혹은 크리스찬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두 제자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따라오는 우리를 보고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What are you looking for?)

“무엇을 찾느냐?” 이 질문은 우리 안의 갈망을 보게 해 줍니다. 우리는 남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고,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를 갈망하며, 좀 더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기를 갈망하고, 가족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갈망합니다. 성경에서도 눈먼 이들은 보기를 갈망하고, 아픈 이들은 낫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불쌍한 사정을 보고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꼭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용기를 내어 갈망하는 것을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가슴 안에 응어리진 바램이 터져나오기 전에는 예수님은 아무 도움도 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청하기 전에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떤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앞에 하느님이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소원 세 가지를 말해보아라. 내가 이루어 주겠다.” 청년은 망설임없이 한 가지를 바로 말합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저를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겠다.” 그 뒤 세상 모든 여자들은 이 젊은이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매력적인 여자들이 젊은이를 사랑했고 젊은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젊은이는 자신이 청한 것 때문에 괴롭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들은 그가 가만히 있도록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구애를 했으며 바깥에는 그를 만나려는 여자들로 넘쳐났습니다. 스토킹을 하거나 협박하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도망치다가 지치고, 피하다가 포기한 그가 두번째 청을 드렸습니다. “저를 제발 혼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제 젊은이는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소원으로 무엇을 청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청하자니 건강이 걱정이 되었고, 건강을 청하자니 명예를 얻고 싶어졌습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한 가지를 정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고민하다가 지친 젊은이는 마지막 소원을 말했습니다. “제가 무슨 소원을 청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라면 이 세가지 소원을 청했을 것이다.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갈 지혜, 깨달은 것을 실천할 용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을 사랑이다.” “하지만 이미 저는 세가지 소원을 다 써버렸습니다.” 젊은이가 낙담하며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미 네 안에 지혜와 용기, 그리고 사랑을 심어 놓았다. 다만 그것은 씨앗으로 주어졌으니 앞으로 네가 그것을 어떻게 보살피고 키우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는 무엇을 찾아 밖으로 눈을 돌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잘못된 곳에서 정열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실망하고 상처받습니다. 마치 젊은시절 방황하며 온갖 시련을 겪은 뒤에 자신의 갈망을 깨달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과 같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함께 아니 있었나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요한의 제자들은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대답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찾는 것, 메시아를 만나고 싶은 갈망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함께 묵었다는 것은 함께 머물다는 뜻으로 “내게 머물러라”하는 예수님의 초대와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 메시아를 만나 배우고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은 그분과 함께 묵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청했고 예수님과 함께 묵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하시며 당신을 찾는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저 역시 제자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와서 보아라”하시는 말씀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일반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신학교에 들어가 구년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우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함께 머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며 우리는 친구가 되어갔습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면서 깨달은 것은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 하신 첫 강론의 말씀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복음에 의해서 매료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을 알고, 그분과의 우정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과연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제직의 핵심은 예수와 친구가 되는데에 있었습니다.”

“하상바오로야,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이 질문은 더 절실해 졌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사제가 된다는 것을 넘어선 이 질문에 대답해야 했습니다. 사제가 된다면 어떤 사제가 될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2005년 신학생으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 가운데 ‘사라’라는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사랑의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방문해서 문을 들어섰을 때 백명이 훨씬 넘는 홈리스들 가운데에서 제 눈을 사로잡은 것은 사라의 눈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라’라는 말은 그 나라 원주민들의 말로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슬프면서도 깊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제가 퍼준 밥을 먹었습니다. 사탕을 주어도 춤을 추어도 웃지 않던 사라는 제가 떠나려 할 때 말없이 다가와 제 손을 조용히 잡았습니다. 저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사라를 안고 입맞추었습니다.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기에 비닐봉다리에 밥을 싸 가는 사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끼니를 이미 걱정하는 사라의 눈을 기억하며 그곳을 떠나면서 무엇인가를 사라를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사라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라를 기억하며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그해 다른 신학생 한명과 하프 마라톤을 달렸고 돈을 모아서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라는 성 이레네오의 말을 따서 사라를 위해서 달리는 우리의 이름을 “살아있는 사람 (Living Person)”으로 불렀습니다. 그 다음해는 처음으로 풀 마라톤을 달렸고 여섯 명의 다른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살아있는 사람”은 성령의 성전인 자신의 몸으로 마라톤에 도전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사라를 위해 시작한 “살아있는 사람”은 작년 2011년까지 200명이 넘었으며 삼천만원이 넘는 성금을 모아 마다가스카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사랑의 선교회로 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2005년부터 매년 마라톤을 달리면서 사라를 잊지 않게 되었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 사라는 제 땀이며 열정이 되었고, 사라는 저를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보스턴 마라톤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달리기와 가난한 사람들이 제 사제직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머무르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달리면서 부르심을 듣습니다. 사제로서 순명과 정결만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제 성소가 되었기에 살아있는 한 나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가장 친한 친구로 둔 제가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갈망은 무엇입니까? ‘와서 보아라’하시는 예수님과 머무르며 그 갈망에 응답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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