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한 현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사람들은 ‘나꼼수’와 같은 프로그램에 열광합니다. 그것은 답답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풍자프로그램이 권위조차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은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과연 무엇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일까요? 그것은 경계를 뛰어넘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드러내 보여줄 때, 누구나 알면서도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때, 사회적 편견과 관습을 뛰어넘어서 가르칠 때 그것은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거기에 권위는 사람들이 줍니다. 그 새로운 가르침이 진리이고 그 가르치는 사람에게 진정성과 사랑이 있으면 그 가르침은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서 진리와 진정성을 깨닫기에 권위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가르침의 새로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심에서 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행동, 거룩한 회당에서 모두가 외면하는 더러운 영과 마주하는 용기가 사회적 편견과 관습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이처럼 사람을 사랑하기에 행해지므로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 곧 경계를 뛰어넘는 가르침입니다.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곳으로 1992년 LA폭동이후 소수민족간의 적대감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빈민가의 한 고등학교에서 선생님 한명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히스패닉계는 흑인들과 결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중국인들은 배타적이고, 캄보디아인들과 베트남인은 결코 남이 자신들의 영토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곳에서 백인들 역시 소수민족입니다. 학교 교실은 바로 그들의 새로운 영토이며 긴장과 반목이 끝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Line Game, 선넘기 게임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모두가 선의 한걸음 뒤에 서 있다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 나오면 선 앞으로 다가서는 게임입니다. 먼저 선생님이 묻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모두가 앞으로 나옵니다.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모두 키득거리면서 앞으로 나옵니다. “혹시 총질을 당해 본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세요” 갑자기 놀란 학생들이 머뭇거리며 대부분 앞으로 나옵니다. “총기 사고로 친구나 가족 가운데 한명이라도 잃은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 서 계세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두명을 잃은 사람은 그 자리에 서 계세요.” 몇몇은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명이상 잃은 사람?”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는 학생들. 그제서야 학생들은 처음으로 같은 반 학생들을 다르게 보게 됩니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이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폭력의 희생자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합니다.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은 이렇듯 강력합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붉은 악마로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응원할 때를 기억합니까? 그때 우리는 세대와 성, 지역과 이념의 경계마저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레드 컴플렉스 역시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으로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제게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에서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가운데에서 어느날 우리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급식소를 찾아갔습니다. 백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 와서 한끼를 배부르게 먹고 남은 밥을 그 다음날들을 위해서 얻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기쁜 마음으로 홈리스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밥과 국을 정성들여 퍼 주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게 받았고 기쁘게 먹었습니다. 우리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행복하게 먹는 사람들을 보며 뿌듯했습니다. 식사가 마칠 때쯤 사랑의 선교회 수사님께서 기타와 드럼을 들고 나오더니 우리보고 노래를 불러줄 수 있냐고 청했습니다. 갑작스런 청이라 당황했지만 기타와 드럼을 들고 우리는 아는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 할머니들이 땅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어느새 그들 가운데에서 수십명의 사람들과 함께 몸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급식소는 잔칫집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왜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환영받고,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 모두가 기쁘게 춤을 추는 곳, 더 이상 배고픔과 슬픔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가장 인간적인 춤을 추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주는 손과 받는 손은 없고 춤을 추면서 마주 잡은 손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라 한 형제자매가 되고 보니 가난과 인종의 경계는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경계를 뛰어넘는 체험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나와 같은 이웃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은 해외원조주일입니다. 오늘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해 2차 헌금을 하고 그 돈을 해외원조 사업을 위해 사용합니다. 과거 6/25를 통해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처지에 있을 때 우리는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먼저 묻고 싶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누가 해외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그냥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주머니에서 천원이나 오천원을 꺼내 2차 헌금 바구니에 넣는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의 몫을 다한 것일까요?
해외원조는 우리나라 밖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와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안과 밖, 나와 너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새롭고 권위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북한에서 독재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리 동포들, 볼리비아와 아프리카에서 선교하고 있는 우리 교구 사제와 수도자들을 보며 도움을 바라는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입니다. 몇 년전 볼리비아에 있는 동기신부를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 역시 워낙 가난한데다가 정치적으로 부패해서 사람들은 하루 천원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신부님이 사목하는 공소에 한국 개신교회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 전부를 모아놓고 종이를 하나씩 돌리더랍니다. 종이에 자기가 필요한 것들, 예를 들어 냉장고나 선풍기 등과 같은 물품을 적어서 내면 한국에 있는 개신교회에서 사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저하면서도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 준다는 제안을 마다할 수 없어서 대부분 무엇이라도 적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물질적으로 미디어를 등에 업고 선교활동을 하는 한국개신교회를 볼리비아의 어느 시골에서 보면서 우리 신부님들의 고생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삼십대 초반의 열정을 가진 우리 신부님들은 개신교 목사님들 다하는 골프칠 시간도 없이 두서너시간 떨어진 도로도 없는 공소로 신자방문을 다니고, 삼년만에 한번 나오는 한국 휴가때는 그곳 본당신자들을 위해서 모금활동을 하다가 다시 돌아가곤 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저는 해외원조가 저 멀리 있는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동료와 형제 자매를 보살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경계를 뛰어넘을 때 그것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못 사는 사람들 역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바로 해외원조주일의 의미일 것입니다.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된 인류, 진리와 사랑으로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실천할 때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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