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무를 좋아합니다. 시골에서 올라가 놀았던 느티나무의 어린시절, 앞집에 핀 라일락 꽃향기에 아찔했던 사춘기, 플라타너스 길을 걸으며 달콤함을 느꼈던 대학시절, 밤나무 꽃 냄새에 찐한 농담을 주고 받았던 군대시절, 신학교 하양캠퍼스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은행나무의 노란물결, 성모당의 벚꽃나무, 목련 등 나무는 제 인생 추억의 일부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나무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나무가 그 자리에 항상 있다는 것을 잊고 지냅니다.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겨울이 되면 가진 걸 모두 버리고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그 초연함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한결같음에서,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꿎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그 의연함에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 씀씀이에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삶의 가치들을 나무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마태 7,17). 모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본질이며 숙명입니다. 그런데 ‘어떤 열매를 맺는가’하는 것은 ‘어떤 나무가 되는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나무가 되고 싶습니까?
전나무는 강직하게 위로만 뻗어 자라 뿌리가 약하지만 바람에 쉽게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리를 이루어 풍상을 이겨내기 때문입니다. 동백나무는 순교자의 붉은 피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른 봄에 피었다가 화려하게 떨어집니다. 대나무는 육십년에서 백이십년 사이에 단 한 번 꽃을 피우는데 꽃을 피우고는 곧 죽고 맙니다. 여러분은 어떤 나무가 되고 싶습니까? 혹시 “가문비나무의 노래”라는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추천합니다.
저는 삼나무를 좋아합니다. 레드우드(Redwood) 혹은 세콰이어(Sequoia)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를 본 것은 미국 샌프란치스코에서 였습니다. 평균키가 80미터 정도 자라고 평균 수명이 400년에서 1000년인데 2000년 이상 된 나무도 있습니다. 1500년 정도 된 삼나무에 손을 대고 올려다보고 있으니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넘쳤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대성당”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어미 삼나무가 자라다가 바람에 쓰러져 죽었는데 그 둥치에서 아홉 개의 삼나무 자식들이 자라나 놀라운 ‘대성당 삼나무(Cathedral Tree)’가 된 것입니다. 어미 삼나무의 죽음이 자식의 생명이 되듯이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무는 한번 뿌리를 내리면 주변 환경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나무간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나무는 여러 해에 걸쳐 열매 맺는 데에만 온 힘을 쏟으면 자생력은 사라지고 점차 기력을 잃으므로 해거리를 해야 합니다. 과감히 열매 맺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재충전하는 데만 온 신경을 기울입니다. 우리도 공동체 생활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적당한 거리와 해거리와 같은 재충전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나무처럼, 나무답게,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나무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