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사제인 제가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 이유는 짐작하시겠지만 강도들이 초주검으로 만들고 놓고 가 버린 어떤 사람을 사제는 보고서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할 사제가 못 본척하고 지나가버린 것은 잘못이 맞지만 ‘왜 그랬을까?’ 사제를 위한 변명을 한마디 해도 된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면서 정결례 규정에 따라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시신을 가까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압니다. 사제나 레위 모두 초주검이 된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은 염려 때문에, 혹시 ‘저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면’하는 걱정 때문에, 결국 두려움 때문에 모른 채 하고 지나쳐 버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럴테니까요.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좋아하는 이웃인가 아니면 싫어하는 사람인가? 나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결국 나에게 좋은 이웃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걱정이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걱정과 두려움에 따라 결정될 때가 많습니다. 그의 기대에 못 미치기 싫어서, 공동체에서 소외되기 두려워서 하기 싫은 일을 계속 감당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므로,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자신, 두렵고 고립되고 무력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감과 자유 대신 불안과 무기력을 경험하고, 희망과 기쁨 대신 공허감과 슬픔을 느낍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성당에서도 사랑의 집에 사는 대신 두려움의 집에 삽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 4,18).
어느날 자잘한 물건을 팔러 시내로 가던 사막의 교부 아가톤이 길가에서 두 다리가 마비된 장애인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가 어디를 가느냐고 묻기에 아가톤 교부는 “물건을 팔러 시내에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는 “나도 데려가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아가톤은 그를 업고 시내로 갔습니다. 장애가 있는 남자는 아가톤에게 “당신이 물건을 파는 곳에 나를 내려 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물건 하나가 팔리자 남자가 “얼마를 팔았소?”라고 묻기에 아가톤은 값을 말해 주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남자가 “나한테 빵을 사 주시오.”라고 해서 그는 빵을 사 주었습니다. 아가톤 교부가 두 번째 물건을 팔자 이번에도 그 남자는 “얼마에 팔았소?”라고 물었고 그는 값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나한테 저것도 사 주시오.”라고 해서 아가톤은 사 주었습니다. 물건이 다 팔려 아가톤은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남자가 “돌아가시오?”라고 묻기에 아가톤은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부탁이니 나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도로 데려다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아가톤은 다시 그를 업고 그 자리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때 장애가 있는 남자가 말했습니다. “아가톤, 당신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느님의 복이 충만하오.” 아가톤이 눈을 들어 보니 그 사람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장애가 있던 그 남자는 주님의 천사였습니다.
늘 기도하며 하느님의 사랑안에 머물렀던 아가톤, 그는 그에게 너무나 과한 요구를 하는 장애인 남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줍니다. 걱정이나 두려움, 괘씸한 마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것을 원하는대로 해 줍니다.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아가톤은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두려움의 집에서 나와 사랑의 집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물겠다.” 아가톤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는 것은 아닌가!’하는 두려움과 불안 대신 사랑을 선택합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과 함께 있으니 두려움 속에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두려움, 불안, 염려가 우리 삶에서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속에 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당신은 하느님의 현존에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음성을 다시 듣고, 온전한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고 더 큰 자유를 불러들입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내가 바라는 이웃, 나에게 좋은 것을 해 주는 이웃, 내가 편한 이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곤경에 빠진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하고 묻고 계십니다. 두려움 속에서 방어적으로 누가 나의 이웃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서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 사는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니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 사람을 도와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것 참 고소하다.’하고 말해도 괜찮은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은 두려움과 증오 속에 머물지 않고 사랑으로 적에게 이웃이 되어줍니다. 그의 마음에는 자신이 이방인으로 받은 고통 안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해 줄 연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내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 역시 염려와 걱정, 불안에 사로잡혀 두려움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 곧 자기 상처만 싸매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상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함께 고통받고 함께 울어주는 연민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합니다. 자신에게만 너그러울 때 그 사람은 괴물이 되고 맙니다.
나의 이웃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말씀이 바로 여러분의 입과 여러분의 마음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언제나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란 불쌍한 내 옆에 사람에게 연민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다가서는 것, 곧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곧 사랑은 결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