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에 마라톤을 하며 만난 친구가 있습니다. 여느 젊은이와 다름없이 발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이 친구의 특별한 점은 몇 년전부터 시력이 약해져 완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이런 친구가 10킬로미터를 달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누군가 옆에서 함께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군위마라톤에서 그 친구가 여자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여자친구 역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10킬로를 완주했습니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 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동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언젠가 시각장애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가는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며 ‘앞에 계단이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그 계단이 올라가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 말하는 것은 빠트린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칠흙같은 어둠속에 있는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길은 있을까요?
바르티매오, 티매오의 아들이며 눈먼 거지. 성경은 한 눈먼 거지의 이름을 친절히 이야기해 줍니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눈이 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자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눈이 멀었다는 것은 하늘의 벌을 받은 죄인이며,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입니다. 눈이 멀면 할 수 있는 것은 거지밖에 없으니 그는 ‘눈먼 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것도 그분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소문을 말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십사고 청하리라.’ 하지만 아무도 눈먼 거지의 이런 바램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고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르티매오는 기다립니다. 예리코는 큰 도시이기 때문에 언젠가 예수님께서 한번은 오실 것이며 그 때 그분을 만나 기적을 청하기로 마음을 먹고 도시의 가장 중심에서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시력을 잃게 된 뒤로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분이 자신이 있는 곳 가까이에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늘기 시작할 때 목청을 높여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꾸짖음입니다. “잠자코 있어라.” 이런 꾸짖음은 지금껏 그가 받아온 설움과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 집니다. 몇몇 사람이 이전과는 달리 제게 부드럽게 말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오, 얼마나 꿈꾸며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예수님이 저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저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예수님의 부르심만으로도 예전의 저를 벗어버린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분께서 제게 묻고 계십니다. 당연히 제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청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분은 단번에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분은 저의 먼 눈에 대해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믿음에 대해 언급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 후 제가 어디로 갔겠습니까? 저를 구원하신 분을 따라 나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본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며 살아갑니까?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있음이 당연해서 우리는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자주 눈을 감곤 합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너무 자잘해서, 때론 너무 많은 것들이 귀찮아서 못 본채 하며 살아가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꾸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와 문화 안에서 일정한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익숙한 것에 안주하면서 우리의 시력은 점점 더 약화됩니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북한은 무조건 싫고, 일본사람은 늘 나쁘고, 나와 피부색깔이나 종교가 다르면 상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전통이나 문화, 관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결국은 편견과 선입견 속에 눈이 먼 채로 살아갑니다. 늘 보던대로 보고, 늘 하던대로 하고, 늘 살던대로 살다가 때가 오면 눈 먼 인생이 끝이 납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칼의 호세 사마라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보면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됩니다. 오직 한 여자만이 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눈이 멀게 되는데 그녀의 남편이 ‘눈이 멀어서 두렵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내는 혼자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말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눈을 뜨고 죄를 짓고 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침내 모든 사람의 시력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은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눈먼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나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와는 다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는 지금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는 보는만큼 믿음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다시 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 청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바르티매오이고, 지금까지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믿음을 가지고 ‘다시’ 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먼 상태, 곧 보이는 것을 보지 않은 척, 죄를 짓고도 아닌 척, 옳은 길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눈먼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귀찮다고, 사람들 보기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르티매오처럼 큰 소리로 외쳐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함께 바르티매오처럼 외쳐봅시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자비로우신 주님은 울면서 오는 우리를 위로하며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