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결심했어!” 이 말은 예전에 ‘TV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A와 B의 두가지 예상가능한 상황에서 탤런트 이휘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마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삶 역시 ‘인생극장’과 같습니다. 매번 선택의 연속이니까요. 그래서 돌아보면 ‘내가 만약 그때 그 대학에 안 갔다면’, ‘그 직장에 합격했었더라면’, ‘그때 그 남자와 결혼했었더라면’ 지금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선택입니다. 삶의 가장 위대한 진리이며 가장 어려운 교훈은 바로 모든 선택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도 친구도 남편도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여러분의 삶은 바로 여러분 선택의 결과입니다. 지금 내 삶이 내가 선택한 결과라고 말하면 인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싫어하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다가올 삶 역시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1독서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집회 15,16).
모든 것은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매 주일 성당에 오는 것도 선택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습관적으로 성당에 오고, 어떤 이는 계명을 어기면 하느님께 벌 받을까 두려워 오고, 어떤 이는 부인에게 잔소리 듣기 싫어서 오고, 어떤 이는 사회적 체면이나 다른 목적 때문에 오고, 어떤 이는 마음의 평화와 가족의 안녕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기 위해 옵니다. 선택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이유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십니다” (집회 15,19).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집회 15,17). 과연 누가 죽음을 바라겠습니까만은 생명과 죽음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택한 길이 생명이 아닌 죽음, 곧 멸망에 이르는 길일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고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 7,13-14).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유명한 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구부러지는 데까지
눈 닿는 데까지 멀리 굽어보면서;
그리고 다른 한 길을 택했다…(중략)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나는 한숨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인 우리는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때 풀이 우거지고 발이 닿지 않은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선택한다면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을 선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시끌벅적하고 요란하게 널찍한 길을 선택하는데 여러분은 조용히 십자가의 길, 비좁아서 찾아드는 이들이 적은 길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선택한 여러분,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느낍니까?
영화 스타워즈에 보면 제다이를 가르치는 스승 요다는 말합니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지 노력이란건 없다(Do or not do. There is no try).’ 중간은 없습니다. 하거나 말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지 ‘노력하고 있다.’는 말은 변명일 뿐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변명으로 가득 차있다.’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하고 계속 그 길을 가야합니다. 가다가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노력하고 있다고 변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마태 5,37).
복잡한 세상을 지혜롭게 살고 싶으신가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가지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지혜는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은 아니다.’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신 것,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1코린 2,9-10).
지혜를 가진 사람은 다음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언제나 카펫 위를 걸을 수 있느냐? 세상 모든 곳에 카펫을 깔아야 하느냐?” 지혜로운 이는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 발을 보호하기 위해 슬리퍼를 신는 것이 더 낫습니다.” 지혜는 가르칩니다. “그렇다. 만약 네가 평화를 원한다면, 너 자신을 바꾸어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바꾸지 말고.”
우리는 모든 길을 가 볼 수 없습니다. 선택을 해야 하고 이것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물론 어느 길을 가던지 간에 아쉬움은 남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멸망에 이르는 널찍한 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천주교인은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계명을 지키며 충실하게 사는 것이 자신의 뜻에 달려 있으며 손을 뻗어 그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고백합시다.
“그래, 결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