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0년 1월이 다 지나갔습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른건가요? ‘과연 인생이 무엇인가?’하고 스스로 묻게 됩니다. 공동체 미사나 봉성체에서 많은 형제 자매님들을 만나면서 ‘평탄한 인생이란 있는가?’, ‘안 아픈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쉽지 않은 인생을 아픈 몸과 마음을 이끌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제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 전 빛잡지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습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것 없습니다.’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소소한 근심은 이것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크게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소소한 근심을 가지고 비루한 하루를 견디어 내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생의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더 절박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며 준비해야 하는가? 죽어본 적이 없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공포이며 두려움이며 허무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내며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늘상 궁금합니다. 제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특별한 두 사람이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하는 훌륭한 길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바로 시메온과 한나입니다. 복잡한 세상,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를 떠나 성전에 머무는 이들에게는 성령이 그들 위에 머물러 계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시메온과 한나는 건물인 성전에서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자신 안에 성령이 계셨기에 스스로가 성전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토 전서 6장 19절은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시메온과 한나는 젊어서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마음대로 살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 안에 하느님의 성령이 계시며 자신은 성령의 성전임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믿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까?
시메온과 한나는 또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 것에 관심을 많이 둡니까? 기도는 커녕 일주일에 단 두 시간을 못 내어 주일미사를 빠집니다. 세상 온갖 근심과 걱정을 자기가 짊어진 것처럼 바쁘고 정신없이 삽니다. 여러분은 기도합니까?
마지막으로 시메온과 한나는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축복하는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내 것만을 위해 사는 나눠줄 것이 없는 부자보다는 축복하는 가난한 사람이 더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은 남을 축복합니까, 아니면 저주합니까? 남에 대해 좋게 말할 것이 없다면 아예 입을 다무는 것이 낫습니다.
시메온과 한나의 모습은 우리가 바라고 준비해야 할 우리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자신이 성령의 성전임을 깨닫고 거룩하게 기도하며 축복하는 삶을 사는 것,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메온의 고백과 찬미가 가슴에 더 와 닿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2,29-30).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시의 첫 구절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름답게 떠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는 않아야 하겠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인생의 절반이 고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관계 맺지 않는다는것은 인생의 절반과 관계 맺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행복할 때는 만사가 다 좋지만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겁을 먹습니다. 용기를 내어 믿음을 가지고 고통과 관계 맺고 고통을 받아들일 때 삶은 두 배는 더 흥미로워집니다. 고통과 관계를맺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봉헌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역시 성전에 봉헌되셨음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 자신도 주님께 우리의몸과 마음을 새롭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때 오늘 축복한 초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당에서 미사 때 켜는초는 박해 때 동굴이나 카타꼼바에 숨어서 기도할 때 어둠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숨어서 기도할 필요는 없지만 초를 보면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을 태워 빛을 내는 초는 자신만을 위해 타다가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태워 누군가를 위해 빛이 되어줍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줍니다. 우리 역시 이런 초처럼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바쳐야 하겠습니다. 늦은 밤 초를 켜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이 머무는 성전이 되며, 시메온과 한나처럼 축복하는 사람, 평화로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메온과 한나를 생각하며 나 자신이 성령의 성전이며,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며 축복할 때 언젠가 주님을 내 품에 안고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인생이 만만하다거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용기있게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이웃에게 축복을 전하다가 평화로이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