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믿음의 문제라면 삶에서 신앙을 분리해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기억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세례의 물은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준비한 정화수와 신에게 자비를 비는 눈물은 있었다. 가족의 안녕을 바라는 어머니는 신실한 불자였고 바쁜 생활 가운데에서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중학생이 되어 학교생활이 무료해질 무렵, 형이 나를 성당으로 인도했다. 낯설면서도 끌리는 분위기와 밝은 또래의 무리 속에서 신앙에 앞서 사춘기 소년의 떨리는 감정이 있었다. 학교수업보다 훨씬 재미있었던 육 개월 간의 교리수업, 엄청난 충격의 세례식, 산간학교, 학생회 활동 등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막연히 사제가 되면 멋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람들의 관심도 받고 싶었던 소년이 찾던 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사람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유행과 같던 교리교사를 시작했고 일 년 반 뒤에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몇 가지 종교 가운데에서 쇼핑을 하다가 가톨릭으로 돌아온 경험은 나름 신앙은 선택임을 가르쳐 주었다. 철이 들어 복학한 뒤 다시 시작한 교리교사, 그리고 유럽으로의 어학연수와 배낭여행은 내 개인적인 종교가 세계적이며 보편적이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했다. 순탄한 신앙생활을 통해 그저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시련을 맞이했다. 졸업을 앞두고 터진 IMF는 한 인간의 계획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하는 것과 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전혀 준비되지 못한 도전을 가져왔다.
신규채용이 전혀 없었던 국내를 떠나 중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는 신앙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국생활에서의 신앙은 이질적이며 부수적으로 여겨졌으며,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은 적극적인 헌신과 모험을 뜻했다. 돈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였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 된 곳에서 단식이나 금육은 우스운 것이었다.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곳에서 정의나 자비가 있을리 만무했다. 숨 막힐 것 같던 직장생활이 내 인생길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지원했다. 믿음은 선택에 달려있고, 자신의 선택에 발을 딛고 꼿꼿이 서 있어야만 했다. 신학교 입학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가족과 세속을 떠나 더 이상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복한 한티성지에서의 시간, 대구가톨릭대 하양캠퍼스에서의 이년, 그리고 남산동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처음으로 신앙을 접했던 중학생 시절처럼 즐겁고 빠르게 지나갔다.
신학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원장신부님의 호출이 있었는데 미국 클리브랜드로 유학을 가라고 하셨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신학교 생활이 즐겁고 편했던 내게 선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중은 절이 익숙해지면 떠난다.” 보이지 않는 길을 믿고 나서야 할 때가 또 온 것이다.
미국 신학대학원에서의 4년간의 시간은 은총이었다. 비단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배움과 체험의 기회만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신학교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며 낯선 땅의 이방인으로서 살면서 나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얻었고,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사제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지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2007년 사제서품을 받고 클리브랜드 교구 본당에서 사제로서의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 연로하신 분이 많던 공동체였기에 아픈 분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드릴 기회가 많았다. 평소 알고 지냈던 지역 피정센터를 맡고 있던 예수회 신부님으로부터 영성지도를 받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일년 뒤에 은퇴한 영성지도 신부님은 내가 있던 본당으로 와서 살게 되었고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 건강했던 영성지도 신부님이셨지만 암이 발병하고 나서 마지막 일년을 본당에서 함께 보냈다. 신부님께서 하느님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을 때 난 신부님께 마지막 축복을 청하였다. 야곱이 그토록 원했던 아버지의 축복을. 신부님께서는 비단 축복만이 아니라 충실한 종, 성실한 사제, 모든 이의 친구로 삶을 마감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셨다.
본당을 떠나 예수회 대학에서 원목 신부로, 대학원생으로 젊은이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보냈던 이년의 시간은 미국에서 얻은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들 안에서 신앙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finding God in all things)하고 성찰하는 이냐시오 영성을 뿌리내릴 수 있었다.
팔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2011년 귀국하여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일년간 사목하였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함께 느끼면서 한국 본당사목의 즐거움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그 뒤에 교구장 비서신부로 발령받아 소임을 하고 있다.
사제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 성찰하는 일이다. 그 안에서 자신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기 때문이다.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는 주님을 알기 위해서도 성찰은 사제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