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어느 공소를 방문한 뒤에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그 깊은 심산유곡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교우촌을 찾아가면 말은 통하지 않는데도 신부가 앉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아서, 남녀노소가 신부가 기뻐할 일 같으면 뭐든지 하려고 끊임없이 살핍니다.
어쩌다가 신부 입에서 조선말 한마디 튀어나오면 온 신자들이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죠. 어린아이는 이름 모를 꽃 한송이 따가지고 와서 살짝 놓고 가고, 어른들도 조금이라도 신부가 눈길을 주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줄 알고 즉시 갖다 놓는 겁니다.
신부가 다음 교우촌을 향해 출발하면 교우들은 “안녕히 가십시오.”하는 말도 못하고 몰려서서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모습이 사라질 때 쯤 거기 모였던 모든 교우들이 소리 높여 울기 시작하지요. 갑작스런 그들의 울음 소리에 가슴이 아파 되돌아가면 신부를 붙잡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말씀 한마디만 남기고 가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마디 하고 가면 또 따라와, “더 오지 마라.” 그러면 거기에 그냥 서 있지요.
깊은 산속에서 그대로 말입니다. 신부가 모퉁이를 돌아갈 때가 되면 또 웁니다. 얼마나 처절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베르뇌 신부는 프랑스 르망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은 후에 다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아시아 선교를 자원합니다. 베르뇌 신부는 1854년 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몰래 조선으로 입국합니다. 전국의 공소를 방문하고 기도서, 교회서적 등을 펴내니 교우수가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1866년 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 때에 잡혀 숱한 고문을 받고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죽게 됩니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하면서 기쁨에 넘친 얼굴로 희광이의 칼을 받았다고 합니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다른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과 함께 시성됩니다.
쿠베르탱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사람, 피에르 드 쿠베르탱을 떠올릴 것입니다.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 샬르 드 쿠베르탱은 아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그림을 남겼습니다. “출발(Le Depart)”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의 파견미사의 모습인데 우리 나라의 103위 성인 가운데 세 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얼굴이 환히 빛나는 분이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님이고 그 좌우에 성 헨리코 도리 신부님과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님이 서 계십니다.
당시 아시아 지역으로 파견되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이 삼년 내에 순교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님은 “외국인이라 죽이기 곤란하니 너희 나라로 돌려보내 주랴?”하고 묻는 의금부 관리에게, “조선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도리 신부님도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베르뇌 주교님과 함께 순교하실 때 두 분의 연세는 각각 28세와 27세였습니다.
도리 신부님을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베 마리아”의 작곡자로 유명한 프랑스 낭만파의 거장, 샬르 구노입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성당의 오르간 주자였던 구노는 조선으로 파견되어 순교한 선교사들을 위해 가톨릭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를 작곡했습니다. “주의 용사들이 승전하고 계시니”라고 노래하는 그 용사들이 바로 이 그림에 담겨 있는 세 분 성인들입니다. 그림 왼쪽 끝에 얼굴만 살짝 보이는 남자가 화가인 샬르 쿠베르탱이고,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뒤를 돌아보며 방실거리고 있는 아이가 바로 훗날 올림픽을 부활시키게 되는 피에르 쿠베르탱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을 온 몸으로 보여준 프랑스 청년들,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젊은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로 떠나며 유서를 적을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저는 지난 수요일에 친구 신부님의 송별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신부님은 저와 같은 나이인데 아프리카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선교를 자원하여 이달중에 떠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아프리카로, 그것도 아직 내전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나는 것과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조선으로 온 것이 참 닮은 것 같습니다. 친구 신부님을 떠나보내는 제 마음이 짠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끄러웠습니다.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우리의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한티의 이름없는 무덤들을 걷다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포졸이 심산유곡인 한티 교우촌을 덮쳤을 때,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었습니다. “너는 천주교 신자냐?” “그렇소.”하고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고, “아니오.”하고 말하면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너는 천주교 신자냐?”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옹기장수로 살아야 했던 부모를 둔 한 소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김수환 스테파노입니다. 용대리에서 “저 산 너머”를 바라보며 날품팔이를 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던 소년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역시 바오로 사도처럼,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처럼, 중아공으로 선교를 떠나는 친구 사제처럼, 우리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남은 사순절을 극기와 절제, 사랑의 실천으로 잘 살아 그분과 함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