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렇게 넘치는 풍요를 경험한 적이 없으며, 의학의 획기적인 발전은 유아사망률을 낮출 뿐만 아니라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누구나 장수를 누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첨단 통신장비를 통해 세계 곳곳의 소식도 안방에서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이동수단의 발달로 세계 어느 곳이나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 가운데 어떤 사람, 심지어 왕이나 황제도 이같은 풍요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피곤하시죠? 너무 바빠서 쉴 틈도 없고, 쌓이는 스트레스 때문에 피곤하시죠? 그 피로가 간 때문인가요? 광고의 말대로 몸에 피로물질이 쌓여 있으니 활성비타민을 먹으면 해결되나요?
가장 풍요로운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과잉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며, 모든 사람이 무한정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생산성과 효율, 이윤으로 대변되는 ‘성과’를 최대로 내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고 믿는 ‘성과사회’입니다. 예전에는 지켜야 할 규율이 있었고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법과 관습이 중심이었던 ‘규율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면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성과사회에서는 무한경쟁에서 뒤쳐지면 낙오자, 탈진 혹은 번아웃으로 끝이 납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에서 실패한 자신은 특히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만나는 이웃의 삶을 보며 그들은 늘 화려하고 즐거운데 자신만 외롭고 가난한 까닭에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멀티태스킹으로 대변되는 사회분위기는 단순히 분주하기만 할 뿐 어떤 새로운 것도 만들지 못합니다. 현대인은 심심함을 참지 못해 스마트폰에 집착하며 초조와 불안을 잊고자 여가나 취미활동에 몰입합니다. 죽음을 잊고자 건강의 여신을 쫓아 온갖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관리하며 절제보다는 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산만하고 무절제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쾌락을 쫓다보면 결국은 중독에 빠지게 되어 약물, 술, 게임에 빠지고 신경안정제를 달고사는 ‘도핑사회’로 나아갑니다.
종교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멈춤’입니다. 어느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쉬어야 합니다. 멈추고 조용히 앉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살펴야 합니다.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이 시대의 위기입니다. 하느님도 이렛날에는 쉬었습니다. 이 날을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모든 창조물이 쉬도록 하셨습니다.
쉬고 싶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잊고 푹 자고 잘 먹고 필요한 운동과 조용히 사색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충동이나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충동을 모두 따르는 것은 일종의 병이며 중독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절제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이런 힘은 침묵과 기도 안에서만 자라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이십니다.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사람들이 하느님의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여섯 날을 사회에서 경제활동 혹은 가정생활을 하다가 주일에 성당에 옵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우리의 생각은 시장이나 직장, 가정에서 있었던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장에서의 논리, 곧 주고 받는 거래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집에서도 힘을 발휘합니다. 내가 하느님께 주일에 이만큼의 시간과 돈을 드렸으니 하느님께서도 그에 합당한 것을 나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느님과 거래하는 것이지요.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느님은 어리석습니다. 생산적이지도 않고 장사에는 완전 꽝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관리만 잘해도 충분히 최고의 경영자가 될텐데 몸소 말단 직원이 되어 가장 어려운 일을 짋어집니다. 자신의 것은 하나도 안 챙기고 오히려 자신마저 내어 놓습니다. 하느님은 약합니다. 잘못했다고 용서청하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하십니다. 능력과 성과로 평가하기보다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알고 어루만져 주십니다. 정의에 앞서 늘 사랑을 챙기십니다. 따라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합니다” (1코린 1,25).
멈추고 쉬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달려오던 방식으로 계속 가지 말고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탄성의 운동법칙을 바꾸는 방법은 깨달음 뿐입니다. 멈추고 생각하지 않으면 계속 같은 방향으로 정신없이 가다가 어느 순간 동력이 다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심장이 멎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멈추고 침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이웃을 용서하고 자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며, 용서 청하는 이를 감싸주시는 어리석고 약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시간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늦기 전에 정신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숨기고 포장하고 자랑하겠습니까? 그저 있는 그대로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서야 합니다.
사순시기, 멈추고 반성하고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기 참 좋은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