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서 기대하는 것과 그 신앙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특히 살면서 ‘왜 나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하느님께 실망한다. ‘왜 하느님은 불공평하신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일찌기 욥의 아내는 아무 이유없이 고통받게 된 남편에게 불공평한 하느님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선택하라고 했다. 바로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2,9)는 것이었다. 하지만 욥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두려움없이 아무도 대놓고 묻지 않는 질문을 했다. ‘왜 하느님은 불공평하신가?’공평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이다. 우리는 은근히 ‘결함 없는’ 세상을 바란다.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고, 부모님께서 오래 건강하게 사시고, 부정과 부패, 불의가 없는 세상을 갈망한다. 하지만 곧 그런 갈망이 우리를 실망시킬 것임을 몸소 배우게 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 가족 가운데 아픈 사람, 불의로 넘치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배운다.왜 하느님은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었을까? 혹은 왜 우리는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고 기대할까?
사람들은 말한다.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하느님이 나의 기도에 뚜렷하게 응답해 주신다면’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이 믿을만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다면’ 모두가 주님을 믿고 따를텐데…실제로 주님은 당신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셨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파라오에게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그들을 홍해바다를 걸어서 건너 광야로 이끄셨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당신 모습을 보여주셨고, 때로 천둥과 같은 소리로 말씀도 하셨다. 신약에 이르러 하느님은 직접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에서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기적을 행하며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성경은 놀랄 정도로 일관성있게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고 열렬히 환영하던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이 행하신 기적이 절대로 깊은 믿음을 낳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적은 주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믿을 이유를 굳건히 해 주지만, 주님을 부인하기로 결심한 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경에서 기적들은 대부분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선택하신 길은 화해와 사랑의 길이다. 태초에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 다음에는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의 속을 채우는 생명이자 숨이 되셨다. 구약시대 때는 거룩한 계약궤를 건드린 자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하느님의 이름은 발설할 수도 없었지만 신약에 이르러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고 치유되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부르게 해 주셨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의 주인이지만 사랑 때문에 종이 되기를 서슴치 않으시고 우리처럼 불공평한 세상에서 고통받으셨다. 그리고 불공평한 세상을 십자가를 통해서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불공평하게 저주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엄청나게 불공평한 세상과 놀라운 하느님 사랑의 결합이다. 세상의 불공평과 부조리를 하느님은 십자가를 통한 사랑으로 껴안으시고 어둠에서 부활을 이끌어내셨다.
다시 물어보자. “하느님은 불공평하신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주어진 세상이 불공평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자신도 불공평함의 비극이나 실망에서 면제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하느님께 그것이 비극적 결말이 아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불공평을 몸소 받아 안고 뚫고 나아가셨다. 믿음과 사랑의 힘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에 맞섰고 어둠 속에서 빛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진정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 뜻대로 해주시도록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가 느끼는 하느님에 대한 실망감은 그 자체가 이미 그보다 나은 무엇, 이 세상에서 채울 수 없는 것,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바라볼 무엇을 향한 신호요, 통증이요, 허기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든지, 아닌 것처럼 살든지 ‘선택’해야 한다.
여호수아의 말처럼, 강 건너 이방인의 신들을 섬길 것인지, 주님을 섬길 것인지 바로 ‘오늘’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