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역설’ 중에서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다.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우리 시대의 역설’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부모 세대보다 더 행복한가?” 우리는 더 부유하고 더 편리하고 더 많이 가졌지만 동시에 더 이기적이고 더 게을러졌고 더 탐욕스러워졌습니다. 우리는 결국 더 가난해졌습니다. 이기심과 교만, 탐욕에 갇혀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못하고, 나눌 것이 없는 더 가난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경북 풍기에서 농사와 과수원을 하는 집안에서 7남매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시골에서 당신을 이어 농사를 짓기를 바랬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을 한 뒤에 형을 낳고는 대구로 떠났습니다. 그때 아버지 수중에는 5만원이 전부였습니다. 세 식구는 대구 신천동에 단칸방을 얻었습니다. 곧 제가 태어났습니다. 달동네로서 ‘감밭’이라고 불리웠던 그곳은 골목이 너무 얽히고 섥혀 있어서 보통 사람은 길을 잃기가 쉽상이었습니다. 동네에는 공동화장실이 있었고, 감밭을 내려오면 칠성시장으로 가는 잠수교가 있었는데 큰 비만 오면 잠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놀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골목길을 누비고 감나무에 올라가고 더운 날이면 수돗가에서 어머니가 등목을 해 주셨고, 김장철이 되면 작은 마당에 모두가 모여 김치를 담그곤 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따뜻했고, 많이 웃고 많이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다고 합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라는 인사가 늘 들려옵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부와 편리함을 누리며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바빠서 그것을 즐기며 웃을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에 중요한 관계의 자원인 가족이나 친구와 보내는 시간보다 회사 동료나 손님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출퇴근 시간의 증가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낯선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시간은 내어줄수록 더 많아집니다. 남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면 남에게 할애하는 그 시간만큼 시간적 여유가 생깁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을 비움으로 자신을 채우는 삶의 비결을 알고 있고, 시간을 내어줄수록 시간의 부자가 된다는 삶의 진실을 따라 살아갑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의 부자들처럼 너무 많은 선택사항, 곧 옵션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달동네에서 살았던 유년시절, 부족함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은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의 삶이 불만족스럽고, 자신의 일이 너무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아 캄캄하다고 느껴진다면 다시 가난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살이 너무 쪄 비대해진 사람이 혈액순환이 안된다면 단식으로 몸의 체지방을 빼야 하듯이 여러분도 영적인 단식이 필요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생각, 자신의 욕심, 자신의 기대로 가득찬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 곧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연민, 배려, 사랑으로 채울 때 좀 더 의미있는 삶을 살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시련 가운데에서도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때에야 마음의 가난이 더 절실히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 곧 심리적으로 도움이 필요하고, 영적으로 부족하고, 신앙적으로 하느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은 가난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을 청할 때 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내며 우리는 먼저 우리의 가난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우리보다 먼저 그들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대로,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로마 12,15-16).
“청빈이야말로 세상에 있는 모든 행복 중에도 행복이며, 어마어마한 왕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청빈은, 이승의 모든 보화를 쓰레기같이 여기는 이를 바로 그 주인이 되게 해 줍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의 역설을 다시 되새기며, 우리 삶에서 사람의 존엄을 해치는 진정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나로 채우는 덧셈보다는 뺄셈, 곧 나누는 마음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새깁시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고 나의 시간과 마음을 내어줌으로써 타인을 위해 기꺼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때, 하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