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고통을 느꼈던 것은 화생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방독면을 쓰고 얼차려를 받고 정신없이 가스실습실로 들어가 다시 얼차려를 받고 나면, ‘방독면을 벗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가스가 코로 입으로 들어오고 곧 눈물 콧물이 빗물처럼 쏟아집니다.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을 때 옆을 돌아보면 동료는 울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비참한 모습으로 나처럼 고통받고 있는게 보입니다. 그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나만 이렇게 힘든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부부들을 위한 ME 주말 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지고 사랑스런 부부라도 그들만의 어려움이 왜 없겠습니까? 2박 3일 피정을 통해 얻는 깨달음 가운데 하나는 ‘돈이 있어도’ ‘자식이 성공해도’ ‘나이가 들었어도’ 모든 부부는 그들만의 고통이 있으며, 타인의 십자가를 보며 ‘우리 부부가 이만하면 그래도 괜찮구나’ 하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타인의 성공보다는 실패를 보면서, 타인의 행복보다는 고통을 보면서 위로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삶은 인간적 위로를 찾는 과정입니다. 멋진 차,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집 등과 같은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혹은 사람들이 감탄할만한 성공과 명예를 얻음으로써, 혹은 훌륭히 자식을 키움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관심을 받고 우쭐해짐으로써, 그것으로 세상적 위로를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건은 닳아 없어지고, 모든 소유는 유행에 뒤쳐지고, 한때의 성공은 사라지고, 자랑스럽던 자식은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믿었던 친구는 배신을 해 허망하게 만듭니다. 결국 인간사의 모든 위로는 궁극적으로 죽음 앞에서 느끼는 한계와 무력감으로 끝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위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하느님의 위로는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안전합니다. 약속에 충실하시고 변함없는 하느님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믿고 기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 예루살렘이 어디 있습니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전, 곧 바로 여기 이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곳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어머니 품안에 자식처럼 걱정없이 사랑과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 하느님의 위로가 인간적 위로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적 위로를 얻는 우리가 이것만은 피하고 싶은 바로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가 얻는 위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상처, 예수님께서 감당하시는 실패, 예수님께 되풀이되는 절망이 바로 우리의 위로입니다. 예수님 삶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그분의 십자가가 바로 나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품에 안고 가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내 편에서 예수님 때문에 주어지는 ‘낙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쟁이, 마리아교 신자라며 배척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보다 먼저 신앙인으로 한 평생을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부모와 이웃을 떠올리면 그런 낙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자세히 쳐다보면 내가 받는 고통이나 시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에, 부모 형제자매 때문에,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위로받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신자가 아니었다면 좀 더 편안한 일요일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만일 내가 신자가 아니었다면 좀 더 자유롭고 즐겁게 살 수 있었을텐데, 만일 내가 신자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내가 사제가 아니었다면 좀 더 나답게 원하는 것을 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나 삶은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결국 나 중심의 삶으로 실패하고 또 다른 위로를 찾다가 끝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인간 삶에서 십자가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십자가를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져 주시는 십자가로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위로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 편한 것, 쉬운 것, 화려해 보이는 것만 추구하면서 이해받고 사랑받고 위로받기를 원하는 이 세상에서 어려운 것, 힘든 것, 아무도 몰라 주는 것을 감내하면서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려 하고,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려 하고,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려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위로입니다. 이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자랑하는 십자가, 곧 죽음을 넘어선 ‘새 창조’입니다. 내 마음을 안아주는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 어디서 이런 살가운 위로를 받겠습니까! 어디서 이런 진정한 위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예수님만이, 그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