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저에게 ‘왜 멀쩡한 사람이 신부가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멀쩡한 사람이니까 신부가 될 수 있었다’고 대답하지만, 이런 질문들을 여러 번 받다가 보면 저도 모르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 내가 이만큼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희생했으니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하겠지!’하는 마음입니다. 요구하고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살면서 보면 잘하는 사람보다 한결같은 사람, 능력보다 성실, 기술보다 성품, 강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 드러내는 것보다 낮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나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자주 체험하면서도 드러내고 대접받고 싶은 마음 역시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고 이기적인 자신에 대해 당황스럽고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특히 반복해서 짓는 죄나 실수는 자아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받은 자신은 더 쪼그라듭니다.
이런 못난 자신을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으로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실상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혼자 있을 때에는 무거운 얼굴을 한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만족을 위해 늘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고, 이벤트를 만들고, 때론 큰 프로젝트나 대규모 공사를 계획하곤 합니다. 동기 신부 중에 한명이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한 가지 이유 때문이야. 외로워서!”
적대자가 목숨을 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참아내는 것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을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아도취가 아니라 윤리나 신앙의 고결한 관점을 적용할 때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자비가 언제 어디서 주어질지 모르기에 믿고 인내하는 것,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너그러워지고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 간에 신뢰와 사랑, 나아가 생명을 가져옵니다.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에게도 때론 잠시 멈추어선 자리에서 숨 고르기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쏟아지는 쎈 물살을 받으며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못난 자신을 인내함으로써 타인을 인내합니다. 이기적인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 잘난체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은 쫓지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긴 어린이인 듯, 제 영혼은 젖 뗀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시편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