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가톨릭 신문을 보고 있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 일면에 대구대교구 자비의 선교사로 제 이름이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자비의 선교사가 아닙니다.” 자비의 희년을 맞이해서 전 세계 각 교구마다 연락 담당이 임명되었는데 우리 교구에서 그 일을 제가 맡게 되었고 가톨릭 신문 기자가 그것을 잘못 듣고 오보를 낸 것입니다. 그 후로 수많은 전화와 축하(?)를 받았고, ‘지금 임명식 참석 때문에 바티칸에 계시죠?’라는 문자도 여러통 받았습니다. 가톨릭 신문 측에서는 오보에 대해 제게 사과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정 기사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김성래 하상바오로 신부는 자비의 선교사가 아닙니다.” (우습죠?)
“저는 자비의 선교사입니다.” 비록 교황청에서 임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사제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가 가장 필요한 것, 곧 자비를 드러내고 살아야 하는 사제이기에 저는 자비의 선교사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자비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15).
여인이 자식을 낳아 젖을 먹여 기르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 일은 자비를 느끼게 해 줍니다. 네 살배기 제 조카를 몇 시간 돌보는 데에도 그토록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할진데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에 자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사고나 병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평생 자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들 마음에 가득한 죽은 자식을 기억하는 ‘가엾이 여김’이 바로 자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가 체험하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이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버림받음과 잊혀짐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가진 젖먹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치원 아이들, 공부방 청소년들, 병원 환자들, 본당 신자들, 동료 수도자들, 함께 일하는 사제들, 이 모든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여러분의 젖먹이들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이들에게 매일 말과 행동으로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는 주님의 자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 역시 자비의 선교사입니다.
오늘도 고해소에 들어갈 때 주님의 자비가 먼저 필요한 저를 봅니다. 통회하는 죄인과 같이 뉘우치고, 아파하는 영혼과 같이 울고, 기도하는 신자와 같이 손을 모을 때 젖먹이 여인의 마음을 닮은 자비의 선교사로 성장해갑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