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몹시 근심한 제자들이 저마다 묻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팔아넘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확인합니다. 자신은 저렇게 게으른 수도자가 아니며, 욕심 많은 사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이것은 이기적이고 슬픈 질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래도 저는 그렇지 않다는 이기심의 발로이며, 동시에 자신만 빼고는 아무도 남지 않을 세상에서,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이 새삼 생각납니다. 그의 능력과 기회에 따르면 성공이 바로 목전에 있는데, 그는 스물 여덟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는 고통 받는 나라와 국민을 보면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가 아니라 “주님, 저는 왜 아니지요?”하고 물었습니다.
모욕과 수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아야 잘 사는 시대에 우리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존경보다는 모욕을, 깨끗함보다는 수치를, 당당함보다는 부끄러움을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자비 때문입니다. 시인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부끄러움을 안고 살았던 것처럼, 상처받은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의 모욕과 수치, 부끄러움을 졌던 것입니다.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나았으니 부끄럽습니다. 오늘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물으며 저 혼자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외면하니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많은 은총을 받으면서도 부끄럽지 않으니 부끄럽습니다. “주님, 저는 왜 아니지요?”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물으며,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의 ‘참회록’이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의 ‘참회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