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살이를 네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들고 장가간다.” 실제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들고 장가가다가 홍수가 들이닥쳤고,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임금이 혼인잔치에 초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들고 장가가기 바빠서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태중의 아기 때문에 행복한 두 여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가서 독서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전해져 옵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시집들고 장가가지 않는 우리는 어디에서 이런 행복과 사랑을 찾아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혼인과 출산은 인간의 종말론적 미래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행복과 사랑의 본질은 같고, 시집가고 장가들지 않는 사람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것을 찾아갑니다.
행복은 기쁘고 만족한 상태만이 아니라 깊은 황홀경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황홀경은 영어로 ecstasy, 라틴어로 ex-stasis, 곧 나 자신밖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곧 나 자신을 넘어설 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행복은 자신을 타인에게 성실하게 아낌없이 내어줄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몸의 신학’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
하늘나라를 위해 독신을 선택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배우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친 세상 사람들 눈에는 바보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들고 장가가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를 위해 선택하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창조 때부터 주어진 선물인 하느님의 사랑을 그들은 몸으로, 봉헌의 삶으로 매일 추구해갑니다. 나아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갑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이것이 하늘나라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두려움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웃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때, 하늘나라를 위한 봉헌의 삶은 선물이자 축복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길이 곧 사랑의 길이며,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신 행복한 삶의 정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