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 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말씀하시며, 쉼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가르치십니다.
먼저 “따로”입니다. 진정한 쉼을 위해서 우리는 “따로” 떨어짐으로써 익숙한 인간관계, 일, 환경에서 떠납니다. 따로 있을 때에만 같이 있을 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딴곳”으로 가야합니다. 외딴곳은 조용한곳, 한적한곳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방해없이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홀로 있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와같이 가장 기본적으로 “따로 외딴곳으로” 갔을 때 쉼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쉼/휴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먼저 “따로 외딴곳”으로 가는데 익숙하질 않습니다. 쉬고 싶다면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람들로 가득찬 해수욕장이나 공원이고, 우리는 멈추어서기보다는 차를 타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보고 먹고 즐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핸드폰은 어디를 가도 터지고, 끊임없이 주고받는 문자메시지는 잊고자 떠나고자 하는 일상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귀는 아이팟에 점령되어 인위적인 음악이 쉼없이 생명과 자연의 소리를 대체합니다. 그러고나서 휴가를 마칠 때쯤이면 우리는 발견합니다. 휴가증후군, 곧 피로로 진짜 휴가가 절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쉬어라”하고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쉼은 물리적인 휴식입니다. 제 경우는 피정을 들어가면 먼저 잡니다. 시간 제한을 두지 않고 몇시간이고 하루고 이틀이고 그냥 몸이 원하는대로 자고 먹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기도할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삼십일 피정을 시작할 때 영성지도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세가지가 있다. 그것은 잘먹고, 잘자고, 잘싸는 것이다.” 물리적인 휴식은 쉼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일단 피로에 지친 몸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되면, 신진대사가 좋아질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아지고 의욕도 생기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따로 외딴곳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일입니다. 방콕하면서 먹고자도 이런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진정한 쉼을 위해서는 몸의 휴식만이 아니라 “따로 외딴곳에서” 가능한 정신의 휴식이 절대적입니다.
작년 오늘 이 시간, 저는 남미의 볼리비아, 산타크루즈에 있는 한 시골마을에 있었습니다. 여름휴가기간을 이용해 한인치과의사들과 함께 대구교구에서 선교하고 있는 볼리비아로 의료봉사활동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섯명의 대구교구 젊은 사제들이 선교하고 있는 볼리비아는 우리나라의 60-70년대와 비슷합니다. 많은 곳은 아직 전기와 물이 공급되지 않아 해가지면 복현동만한 마을은 암흑천지가 됩니다. 하루에 1000원미만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치과치료는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빨이 썩어 곪아터진 곳을 치료하면서 왜 치과에 가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치과비용 2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2000원이 없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우리 의료봉사팀은 오전 4시간은 큰 마을에서 오후 4시간은 교통편이 없는 시골로 차를 타고 들어가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쳤습니다. 제대로 된 치과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불편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하루 8시간을 꼬박 서서 구부정한 자세로 나무 의자에 앉은 환자들을 치료한 뒤 돌아와 더운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로 대충 씻고 다른나라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같은 강행군이 계속 이어지자 저는 의료봉사활동의 리더로 주일하루를 아무 일정없이 온전히 쉬기로 결정했습니다. 의사들과 젊은이들은 늦잠을 잘때까지 잤고 일어나 먹고 또 쉬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모여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역만리 볼리비아로 와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 그것은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멀고 오랜 우리안에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묻지 않은 볼리비아의 산과 숲 속에서 “따로 외딴곳에서” 쉬면서 우리는 오늘 바친 화답송 시편 23편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파아란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육체적인 휴식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 우리는 씨뿌리는 사람, 하느님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열매맺고 추수하는 것을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성실히 우리의 몫을 다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몇명, 어떤 치료를 얼만큼 효과적이게 했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들도 우리와 같은 형제, 자매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라는 인식이었습니다. 그 뒤로 우리의 의료봉사활동은 일 혹은 성과보다는 만남과 나눔, 이해와 우정으로 바뀌었습니다. 함께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따로 외딴곳에서 쉬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인생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길을 가라고 재촉하지만, 우리에게는 멈추어 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종류의 멈춰 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쉬기 위해 멈추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쉬지 않고 달리다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이 멈춰서는 경우입니다. 쉬기 위해 멈추면 휴식과 충전과 여유를 얻게 되지만 고장이 나서 멈추게 되면 뒤늦은 후회와 회한만이 되돌아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여름휴가를 꿈꾸고 있습니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고” 싶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쉬엄쉬엄 혼자가면서 즐기는 휴가가 더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9월에 1코스로 시작해서 현재 13코스까지 발전한 “제주올레”가 그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제주어로 ‘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올레는 보통 4-5시간을 걷는 길로써 따로 외딴곳에서 핸드폰, 아이팟, 신용카드없이 홀로 걸으면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의미있는 휴식의 장소입니다. 그 안에는 꾸밈없는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더불어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이 담겨있어서 우리에게 제주올레, 곧 “제주에 올레? 제주에 오겠니?”하며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휴가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휴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하고, 계속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쉼을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함께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따로 외딴 곳에서 홀로 자신을 마주하는 것으로 알아듣는다면 휴가는 이 자리에서 지금 가능합니다. 일년 가운데 특정한 기간에 떠나는 휴가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이 위안받고 힘을 얻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휴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 안에서의 쉼, 매일의 휴가시간, 곧 기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떠나 따로 외딴곳 혹은 성당에서 기도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획이나 업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기도 안에서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어디에서나 언제나 쉬면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의 휴가가 곧 일상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내 멍에는 가벼우니 나에게 와서 쉬어라”하신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떠나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외딴곳에서 하느님을 만나 위로받고 사랑받으며 참으로 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름휴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고 일년내내 계속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름휴가를 다녀오셨습니까? 아니면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계십니까? 떠나기 전에 움직이지 말고 멈추십시오. 호흡을 가다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발견하기 전에 나를 만나십시오. 하느님이 “따로 외딴곳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푹 쉬십시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