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목이 뻣뻣한 사람이 넘쳐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이 최선이고, 자신의 말이 곧 진리라고 외칩니다. 목이 뻣뻣한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남이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를 바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줄이기보다 남이 잠잠해지기를 요구합니다. 특히 저는 미국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뉴스와 토크쇼, 난상 토론, 연설 등을 보면서, 이 사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입이 아니라 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이의 말처럼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인 까닭은 우리가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두배로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목이 뻣뻣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왕을 치켜세웠다가 끌어내리기도 하고, 왕을 삼아 농담을 하곤 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장관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장관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사회는 장삿꿋 MB이니 제풀에 자살한 대통령이니 하고 말하는데, 그 안에서 어른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과연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참다운 왕, 진정한 지도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중국의 성현인 장자는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의 종류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나쁜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경멸을 받는 사람이고, 그보다 좋은 통치자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그보다 좋은 통치자는 백성들의 칭송을 듣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통치자는 누구인지 묻습니다. 그것은 바로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게 만드는 통치자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참다운 임금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세상에서 수많은 지도자와 통치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남 위에 군림하고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상 통치자들에게 반대하고, 비아냥거리고, 농담거리로 삼는데 익숙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게 만드는 통치자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년전에 켄터키의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개인 피정을 할 때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으로 유명한 이곳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봉쇄와 기도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엄격한 수도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일곱번, 새벽 3시, 아침 6시,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5:30분 저녁기도, 7:30분 끝기도를 바칩니다. 매일 기도의 끝에 수도자들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 이라고 영광송을 바치면서, 120도 이상 깊은 절을 합니다. 그분들의 진정한 왕께 대한 깊은 겸손, 진실한 갈구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왕 앞에 고개를 숙이고자 합니까?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왕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참 왕을 못 알아보는 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그에게는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퇴박을 맞았고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습니다…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습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지도자이며 왕이 아닐까요? 이 사회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같은 섬김의 리더쉽, 종의 리더쉽이 아닐까요? 목이 뻣뻣한 우리를 고개 숙이게 만드는 분은 오직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분일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다운 임금 앞에 깊이, 낮은 자세로 고개를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