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저는 강생의 신비와 임마누엘의 모습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세상이 물질주의를 온갖 악의 근원으로 탓하고, 세속주의를 멸망의 징조라고 비판할 때 우리는 성탄절의 참된 의미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것을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물질의 형상을 띤 것이며, 하늘의 선함이 인간과 세속의 약함을 껴안은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과 살아있는 것이 거룩한 생명의 근원과 결합되었고, 더 이상 어둠과 빛, 세상과 하늘나라로 갈라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은 다름 아닌 물질의 거룩화(sanctification), 인간의 신화(deification)입니다.
2005년 여름, 저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 섬에 있었습니다. 미국 가톨릭의 공식구호단체, Catholic Relief Services의 멤버로 세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난한 나라, 마다가스카에서 CRS의 활동을 체험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둘째날, 우리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했습니다. 불법적인 수감과 비합리적인 법제도는 제쳐두고라도, 300명 수용규모의 교도소에는 1000명 이상의 수인들이 가장 인간적인 조건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새벽 3시, 지정된 수인이 박수를 한번 치면 너무나 좁은 감방에서 새우잠을 자던 모든 수감자들은 왼쪽 어깨를 대고 자다가 동시에 움직여서 오른쪽 어깨를 대고 자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여성들이 수용된 감옥소는 또 다른 비극이 있었습니다. 임신한 채로 입건된 수인이 감옥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있었고, 부모가 함께 잡혀들어올 경우 바깥에 있는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서 자식들도 감옥으로 오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불법적인 구금을 당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재판을 받으려면 보통 수년은 기다려야 했고, 그 사이 아이들은 감옥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해졌습니다. 인권은 둘째치고라고, 사람으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존엄과 권리가 박탈당한 곳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왜 이런 부정과 폭력이 넘쳐나는지 답답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하루를 정리하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한 가운데 예물준비기도에서 사제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물을 조금 따르면서 원래 조용히 기도하는 부분을 똑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여기에서 영어번역이 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By the mystery of this water and wine, may we come to share in the divinity of Christ, who humbled himself to share in our humanity.” 신이신 예수가 자신을 낮추어 우리의 비참한 인간성을 나누려한다는 말씀이 제 귓가를 후려치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현실이 죄로인해 절망과 죽음에 내버려지지 않은 것은 바로 예수가 우리와 같은 사람인 까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흙탕에서 나뒹굴던 죄인이 하늘의 별을 보면서 희망을 꿈꾼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감히 부끄러워 청하지도 못했던 것을 하느님은 거저 주셨습니다. 그것도 온전히 우리를 믿고 아기의 나약함으로 인간에게 선물을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참으로 사랑하시는 곳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6). 성탄절은 하느님, 곧 세상을 버리지 않고 직접 세상의 일부가 되신 하느님의 사랑이야기 (love story)입니다. 언제나 이미 결말을 알면서도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한 사랑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잡는 것처럼,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하느님 사랑이야기는 우리 가운데 살아서 힘들고 고통받는 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 버림받은 이, 나약한 이에게 희망이요 구원이 됩니다.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건 덕분에 우리의 몸, 쉽지않은 현실, 나약한 인간성이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는 첫째 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사랑을 시작하셨기에 우리또한 몸으로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몸은 영혼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성, 곧, 죄, 이기심, 나약함 뿐만 아니라 감정의 달콤함, 가슴의 벅참, 삶의 환희를 모두 포함하는 인간존재전체를 말합니다.
때문에 몸으로 사랑을 말합시다. 우리의 모든 삶, 고통, 나약함, 절망 그리고 기쁨, 뿌듯함, 행복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선포합시다. 미리 용서를 청하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다정하게 안아주고, 겸손하게 처신하면서 몸으로 직접 사랑을 말합시다.
행동으로 믿음을 보입시다.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관념에만 머무르지 않으시고, 직접 사람이 되십니다. 우리도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우리가 믿는 바를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도록 합시다.
받아들임으로 희망이 됩시다. 하느님이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희망은 화려하고 보장된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지닌 한계, 곧 아기의 나약함과 철저한 의존성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기 예수님, 곧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함에도, 육신의 나약함에도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다시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절을 참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