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선물 (The Gift of Peace) 번역을 마치면서
바오로 수녀님과 나의 어머니를 기억하며
암이 내게 찾아왔다. 2007년 사월 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와 함께. 삼 십년 넘게 나는 암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내가 군대에서 복무하던 1994년 할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던가 외할아버지 역시 암과 관련이 있는 어떤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2007년 내게 암이 찾아온 이후에야 다시 깨닫게 된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암에 걸린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1999년 신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김은영 바오로 수녀님을 신학교에서 만났다. 그녀는 포교 성베네딕도회 청원기 수녀였고 나와는 대구신암본당 중학교 동기였다. 백 여명도 넘는 수도자와 신학생들 가운데 우연히 같은 식탁에 앉게 된 우리는 특별한 인연을 예감하면서 하느님을 찾는 길의 도반이 되었다.
2005년 종신서원을 한 바오로 수녀님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목처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미국 클리브랜드 교구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종종 신학교로 배달된 바오로 수녀님의 편지는 내게 항상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 뒤 2007년 사월 사제서품식을 준비하던 내게 바오로 수녀님의 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너무도 젊은 수녀가 이제 일을 시작했는데 암이라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부정도 하고 화도 내 보았지만 친구 수녀가 암으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바오로 수녀님과 나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사제서품 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항암치료 중의 수녀님은 무척 야위어 있었다. 대장암은 조용히 깊숙하게 가난한 영혼을 파괴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나에게 와서 쉬어라”하신 예수님 말씀이 절실했다.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암에 대해서 배워갔다. 암이 어떻게 발생하며 수술과 항암치료가 가져오는 증상들-피로, 구토, 복통, 신경마비 등-을 눈으로 보았다. 집요하게 세력을 확장하려는 암세포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인간의 싸움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링 위에서의 맨손 난투극이었다. 때론 우위를 차지하다가 때론 수세에 몰리면서 라운드가 계속될수록 복서의 기력은 약해져갔다. 손에 땀을 쥐고 응원을 하다가 복서가 그로기 상태에까지 몰리는 것을 보면 흰 수건을 링으로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복서가 다시 일어서는 한 “기권”은 우리 몫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응원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땅에서도 계속되었고 강도높은 항암치료 덕분에 바오로 수녀님에게도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 “잘 쉬는 것이 소임”이 된 친구는 시와 음악, 미술을 통해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고, 미국본당사목으로 지친 내게 활력소가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암은 더 지독하고 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두번째 항암치료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나는 요셉 버나딘 추기경을 떠올렸다. 그는 시카고 대교구장으로 십 사년간 사목하다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후 잠시 회복한다. 하지만 암이 다시 간으로 전이되었고, 치료를 포기한 뒤에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을 충만하게 살았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평화를 묵상하는 “평화의 선물 (The Gift of Peace)”을 남겼다. 나는 바오로 수녀님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싶었고, 이것이 내가 번역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번역은 잘못하면 반역’이라던 옛 교수신부님의 말처럼 번역은 더디고 힘들게 이루어졌다. 어휘선택, 의미전달, 문화적 차이 등 모든 것이 도전으로 다가왔고, 학업 또한 병행해야 했기에 2009년에 시작한 일은 2010년으로 접어들 때에도 절반도 마치지 못했다. 바오로 수녀님께는 전화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 외에 번역을 마친 첫번째 Part를 이메일로 보냈고 감동깊게 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2009년 십 일월부터 바오로 수녀님께서 더 이상의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영양제만으로 버티기 시작하면서 나의 마음은 급해졌다. 그 뒤 글을 읽을 기력조차 없게 된 친구 수녀님에게 “평화의 선물”은 읽을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것, 살아야 할 것이 되었다.
2010년 삼월 십 오일 바오로 수녀님께서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을 때 암은 나의 어머니에게 찾아왔다. 같은 대장암으로 어머니 역시 수술을 받으시고 곧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하셨다. 마치 암이 이제는 나와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방학을 맞아 급히 귀국한 나는 어머니의 오차 항암 때 함께 병원에 입원했다. 밤이면 뒤척이시는 어머니의 침대 옆에서 소리없이 온 몸을 떠돌다가 밤이면 자기를 잊지 말라고 고함치는 암을 보았다. 가장 나약한 시간에 보이지 않는 병과 싸우는 환자들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병원 침대 곁에서 나는 번역을 계속해 나갔다. 버나딘 추기경님의 암과 죽음에 대한 묵상은 어둠 속에서 나를 인도하는 빛이 되었다.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나에게도 평화를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선물이었다. 살아있는 모두를 위해, 특별히 암으로 고통받는 나의 어머니와 장 도르가 수녀님을 위해서 나는 바오로 수녀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여정에 함께 해 준 친구들-루멘 원장 수녀님과 라파엘 수녀님, 허 바오로, 백 라디슬라오, 소 아우구스티노, 주 요한, 김 안드레아 신부들과 백 아녜스-을 위해서도 평화의 선물은 절실했다.
바오로 수녀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많은 이가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했고 우리 곁에 있는 하느님 평화의 선물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암과 싸우는 이들과 함께 걸으며 평화의 선물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김 하상바오로 신부
평화의 선물 (The Gift of Peace)
요셉 버나딘 추기경 (Joseph Cardinal Bernardin)
서문: 놓아보냄 (Letting Go)
지난 영적여정을 통해서 나는 항상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애써왔다. 그러나 막상 현세에서 다음 세상으로 옮겨 갈려는 준비를 하는 지금, 그것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내 삶에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되어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 가운데 다른 어떤 것보다 눈앞에 떠오르는 한가지 주제, 곧 현재의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놓아보냄”(letting go)일 것이다.
놓아보냄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놓아보냄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진실로 일생동안 계속되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마음을 여는 일의 중요함과 무엇보다도 건전한 기도의 삶을 계속해서 추구한다면 놓아보냄은 가능하다. 나는 평생을 이 진실을 배우는데 바쳤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내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하나의 이야기와 그 배경들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고작 열 일곱살에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배우려고 애써왔다. 그 당시에는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성 마리아 신학교(St. Mary’s Seminary)와 가톨릭대학 신학부(Theological College at Catholic University)에 있던 술피시오(Sulpician) 신부님들의 영성지도를 받았다. 매일 저녁 특별히 마련된 시간에 신부님들은 우리에게 묵상할 것들을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날 아침 미사때까지 묵상 장소인 “기도실”에서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돌아보면 과연 이같은 기도 방법이 최선의 형태의 가르침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던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가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갖도록 만들어 주었다. 기도는 말하고 듣는 양방향 행위이다.
1952년 서품을 받은 후, 아마도 나는 그 당시에 바쁜 젊은 사제들만큼은 기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어느 순간엔가 내가 기도보다 선행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신학생, 사제, 평신도와 수도자-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 진실로 일치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실제로는 내 개인적 기도생활에 있어서는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따로 두지 않았기에 내 가르침에 대해서 다소 위선적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것이 기도에 대한 내 열정이 부족했다거나 어느날 갑자기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무척 바빴고, 선행이 기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의 굴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어느날 저녁 식탁에서 나는 세 동료사제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어렸고, 실제로 그 가운데 둘은 내가 1972년에 신시내티(Cincinnati)로 간 뒤 내게서 서품을 받았었다. 대화 도중에 나는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어떤 도움이 없냐고 그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내가 청한 도움이 솔직했는지에 대해서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제시하는 것을 따를 의향이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주교님,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우리 이야기를 정말 듣고 싶으신가요?” 하고 그들이 물었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들에게 말한터였으니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들은 너무나 직설적으로-어쩌면 퉁명스러운 말투로-사제이자 주교인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온전히 실천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 젊은 사제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오늘날 많은 영성지도자가 말하는 “양질의 시간”(quality time)을 기도에 써야한다고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쫓겨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가장 좋은 시간을 따로 만들어야만 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으며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친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가진 가장 최고의 것을 바쳐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내게로 오시는 문을 더 넓게 열어드리기 위해서 기도와 묵상 가운데 그분과 함께 있기로 했다. 이 결심은 내 삶에 새롭고 활기찬 시각을 가져왔다. 자신의 영적 여정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더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암 환자들과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사목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놓아보냄은 여전히 정말로 쉽지 않다. 나는 모든 것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놓아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내 영혼 안에서 더 환대받으시는데 간섭하거나, 하느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을 위해 나를 바치는데 방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와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애써왔다.
하느님께서 지금 내게 놓아보냄을 원하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 안에 어떤 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모든 것에로 집착하도록 만들고 있음은 또한 모든 이에게 익숙한 사실이다. 매일의 기도는 내가 예수님께로, 그분의 나에 대한 기대에로 내 마음의 문을 더 넓게 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에로부터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하면서, 가끔은 절망도 경험하면서, 나를 건져내신 주님 덕분에 나는 지금은 좀 더 자유롭게 놓아보내고 있다. 나는 루카 복음에 나오는 세관장 자캐오 이야기를 묵상해 왔다.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가셨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자캐오가 갑자기 일어서서 주님께, “주님, 가난한 이에게 제 재산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과거에 제가 누군가를 속였다면 그 네 배를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이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참고 루카 9:1-10).
자캐오가 그의 문을 예수님께 연 것처럼 나도 필사적으로 내 영혼의 문을 열고자 했다. 왜냐하면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 예수님께서 내 삶을 전적으로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과거에 많은 경우 나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그분이 들어오시도록 만들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한편으론 그분이 나를 전적으로 차지하는 것이 두려웠다.
왜 두려웠을까? 왜 문을 필요한만큼만 열었을까? 나는 그 답을 내 영혼에서 찾았다. 왜냐하면 나는 때론 성공하고 싶었고, 또한 성공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나의 결정이나 행동에 대한 비난을 들을 때면 실망하기도 했다. 이런 감정들이 지배적일 때 나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즉 모든 것을 “옳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이처럼 행동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내게 증명할 때까지 나는 그들에게 전적인 신뢰를 두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언젠가 내가 주님도 이와같은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을 발견했다. 생각으로는 주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내 자신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주님의 교회이고, 주님의 권한을 벗어나는 어떤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알면서도 움켜쥔 채 전적으로 놓아보내지 않으려는 나를 보았다.
정말로 주님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를 수 있다는 것과 만약 그분의 뜻이 우세하다면 내가 비난받을까 두려웠던 것일까?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나는 그저 놓아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의 주저함의 또 다른 이유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들의 기대는 수없이 많고 다양하고 개인적이어서 나는 그런 압박들에서부터 완전히 나를 자유롭게 만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한편으론, 나를 괴롭히는 단순한 자만심이 놓아보냄의 위험을 따르지 않도록 나를 만들었는지도 물어보았다. 혹은 나 자신이 가끔은 불구가 된 느낌을 받았는지도 물어봤다. 왜냐하면, 나의 관심과 지지를 놓고 경쟁하는 그룹들 가운데에서 나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내가 받아들이도록 요구했고, 한편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내가 그들에게 충실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의 주장이 진실했다 하더라도 나는 교회를 위해서는 옳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었다. 가끔 그에 따르는 불안이 내가 정말로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상황에까지 이르자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떤 것들을 놓아보내는데 주저하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실까 두려운 나머지 주님이 내 영혼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대부분의 일상적인 것들, 즉 다른 이로부터의 받은 선물들에 여전히 내가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십 오년도 더 전에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돈을 남에게 줘 버렸고, 다시는 예금통장이나 주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말해왔었다. 나는 그 대신에 정말 필요한 돈만 은행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지는 거의 모든 예물을 개인적 자선사업이나 다양한 종류의 특별한 프로젝트를 위해 사용하는 시카고 대교구의 특별구좌에 예금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선물을 받아왔고, 은퇴 후에 필요할 것과 병드신 나의 노모를 돌본다는 핑계로 나 자신을 위해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다시 이 모든 것을 되살펴보면서, 과연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지 되살펴 본다.
얼마 전에 놓아보냄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을 때, 나는 하느님이 나를 위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 고난이 단순한 영적 성장의 일부분인지를 성찰했다. 확실히 이것은 후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삼년의 시간은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나와 하느님, 교회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내게 가르쳤다. 이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 그 첫째는 1993년 십 일월에 있은 부정적 성행위로 내가 당한 허위 고발과 그 일년 후에 있은 고발자와의 화해이다. 둘째는 1995년 유월에 췌장암 선고를 받고 수술 후 십 오개월간 “암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1996년 팔월말 암이 간에 재발했고, 일 개월뒤에 화학치료(Chemo)를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남은 생을 가능한 한 충만하게 산 것이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이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있다. 즉 내가 믿는 것과 내가 온 힘을 다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본질 때문에 내 영성이 깊어지고 성장했고 지금 그대와 나눌 수 있는 몇 가지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같은 성찰이 절대로 깊이있는 나의 자서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대에게 보내는 내 마음의 단순한 묵상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의 삶에서 그대를 도와서 그대 역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위대한 선물, 즉 내가 지금 영원한 삶의 입구에 서서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Part One: 허위 고발 (False Accusation)
묵상 (Meditation): 자신 비우기 (Emptying Oneself)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좀 더 넓히시도록 우리를 초대하실 때, 그분은 참으로 부드럽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좀 더 온전하게 그분을 환대하고 그것을 내 전심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찾을려고 애쓰게 되는데, 이에 따라 긴장이나 불안은 그분에게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는 확실하지만 내 자신과 나의 일을 놓아보내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따라서 놓아보냄의 첫 걸음은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훌륭한 계획들이거나 하찮은 잡념들이건 간에 주님께서 진심으로 모든 것을 차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것에서 나 자신을 비우기와 연관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사명이 나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비 2:6-8).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시어 나를 차지하시도록 해야만 한다. 나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게 해 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다.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뚜렷해졌다. 주님은 내가 그분의 복음과 그에 따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불필요하게 차지하는 수많은 부수적인 것들보다 핵심적인 것들에 더 마음을 쓰도록 원하신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누구나 주변의 것들에서부터 핵심적인 것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 핵심적인 것들은 우리에게 진실되게 살며 다른 이들을 더 사랑하도록 요구한다. 반면에 핵심적이지 않은 것들은 우리 자신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는다.
자신을 비우도록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으로서 그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시도한다면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을 나는 배워왔다. 다만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안에서 자신을 놓아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주님의 손길이 내 삶에 미쳤을 때 그것은 내가 언제나 기대해왔던 것처럼 뚜렷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알아듣기 어려운 술렁거림과 속삭임으로 나를 놀라게 할 뿐 아니라 내가 상상했던 어떤 것 이상으로 곧 나를 비우게 만들었다.
허위 고소와 대면하다 (Facing False Charges)
1993년 십 일월 십일 수요일, 나는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연례 ‘토마스 머튼 강의’(Thomas Merton Lecture)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때 나와 함께 있던 존 오카너(John O’Connor) 추기경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불쾌한 소문, 즉 미국 추기경 가운데 한 명이 성 추행으로 고발되었다는 것을 내게 말했다. 그것은 출처가 확실치 않았고, 애매모호한 내용이었기에 별로 염두에 둘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불길한 조짐으로 다가왔다.
다음날 내가 사무실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그 소문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고발당한 그 추기경이 바로 나라는 것을 사람들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친구와의 전화 통화에서 임박한 고발에 대한 소문이 급속도로 미국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내가 신시내티(Cincinnati)의 대주교로 있을 때, 한 신학생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그 고발은 나를 충격으로 몰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황폐화시켰다. 나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신경쓰지 않고 나의 일에만 몰두하려고 했지만 내 가장 깊은 이상과 헌신에 대한 섬뜩한 고발은 나의 의식을 삼키고 있었다. 실제로 보좌관들이 계속해서 여전히 퍼져나가던 소문에 대한 추가적인 상세한 것들을 내게 가져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내 자신에게 단순한 질문을 한가지 했다: ‘절대로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대한 허위 고발을 대면하도록 주님께서 그동안 나를 준비시키신 것인가?’ 조작된 고발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경험한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악몽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날 오후에 지역 NBC 방송국의 매리 엔(Mary Ann Ahern)이 전화를 걸어서 그녀가 고발 내용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는데 피고자의 이름은 스티븐(Steven)이고, 사제 성 범죄 고소의 전문가인 뉴저지(New Jersey)의 한 변호사가 대변인이라고 말했다. 고소장은 다음날 아침에 신시내티에서 접수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그들은 스티븐과 추기경이 함께 있는 사진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라고, 미국 전역 방송국에서 돌고 있는 정보를 읽어 주었다.
우리는 그리고 나서 몇 분 뒤에 스티븐의 성이 쿡(Cook)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스티븐 쿡이라는 이름과 관련있는 얼굴을 떠올려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성 그레고리 신학교의 학부생이었습니다.” 보좌진 가운데 한명이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삼십대 중반인데 에이즈로 심각하게 앓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스티븐 쿡. 난 여전히 거센 폭풍과 같은 소문의 주인공인 그의 이름과 관련된 얼굴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1975년 나의 침실에서 성적인 행위를 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과연 이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아는 것처럼 그도 반드시 아는대로, 왜 절대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나를 고발하는 것일까? 그리고는 이 사람이 이미 신시내티 대교구의 성 그레고리 신학교의 한 교수 신부에 대해서도 비슷한 고발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따라서 스티븐의 판단에 따라 그가 신시내티로부터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하자 그의 변호사가 그 당시에 대주교였던 나를 사건에 끌어들인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물론 나중에 스티븐이 직접 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줄테지만.
그때에 나는 나를 내려놓고 비우도록 청한 나의 기도를 생각했다. 이것이 얼굴없는 고발자가 성 추문자로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위협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사제들이 최근에 감당해야 했던 고소와 같이, 내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숨겨진 응답이었을까? 실제로 다른 많은 교구 이전에 시카고 대교구내에 있는 사제들에게 지워진 성 추문에 대한 절차와 관련하여 나는 첫째가는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데 간과했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와 관련된 절차를 세우자 이것은 미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절차에 따라 나는 첫째로 이 사건과 관련하여 나에 대한 모든 고발사항을 심사 위원회에 넘겼다.
이와 관련된 문의 전화가 계속해서 왔고 이제는 세계로 알려진 고발과 수백만의 사람들이 오직 나에 대해 한가지 사실, 즉 거의 이십년전에 내가 미성년자의 몸과 믿음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실로 고소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나는 깊은 수치감을 느꼈다. 나의 보좌관은 내게 언론을 통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도록 권고했다. 이미 나의 집무실에서 수많은 언론사 차량들이 수페리어 스트리트(Superior Street)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하지도 않았던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과거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악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꼈었다. 하지만 내 영혼의 깊은 심연에서 나는 주님께서 폭풍의 한 가운데에서 나를 진정시키며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 8:32).
나는 즉시 다음과 같은 공식입장을 적었다. “비록 나는 고소를 직접 당하지도 않았고,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상세한 내용도 모르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고 그것을 단언합니다: 나의 전 인생에서 어디에서 어느때고 나는 절대로 누구도 성적으로 학대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진실이 내가 가진 방패막이었다. 공식입장을 언론에 발표한 뒤에 나 자신이 변한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론 변해버린 거리를 따라 나는 집으로 운전을 해서 갔다.
진리가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믿었고, 비록 내가 이유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이 시련을 내 삶에 허락하신 주님을 신뢰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의 문화가 이미지를 만들고 조작해서 거의 완벽하게 진리의 목소리와 바꿔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내 믿음은 계속해서 진실만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며 이것이 내가 필요한 모든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몇 개월동안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나의 막대와 지팡이(참조: 시편 23:4)가 될 것이기에.
진실을 세상과 나누다 (Sharing the truth with the world)
단순한 진실은 나는 결백하다는 사실이었다. 이 진실만이 빗발치는 전화와 모든 시카고 저녁 10시 텔레비전에서 방송한대로 내가 스티븐 쿡을 성적으로 학대해 왔다는 속보가 있었던 그 날밤 나를 지켜주었다. 오직 지역 CBS 방송의 빌 커티스(Bill Kurtis)만이 이같은 고발 뒤에는 다른 속셈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누군가가 버나딘 추기경(Cardinal Bernardin)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을 뿐 이었다. 나 역시 반대자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과연 누가 나를 모함하기 위해서 이같은 음모를 꾸미는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친구 하나가 전화를 걸어서 음모론을 제기했을 때 나는 그에게 이미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같은 파괴적인 고발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화가 났고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같은 고발이 단순한 사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 뒤에는 어떤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첫 걱정은 나의 잘못된 죄로 인해서 교회가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공격은 내가 종교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나의 평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만약 나의 신뢰성이 무너진다면 다른 사람을 이끌 능력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내가 고발당한 사실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그들이 나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고발이 나의 존재와 공직에 있는동안 계속된다면 과연 사람들이 나를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다음 날을 대면하기로 결심했다. 오직 나만이 그런 거짓 고소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본능은 나를 고발한 그 젊은이가 어떤 식으로든 혼자서 이런 일을 꾸며낸 것은 아닐 것이다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런 흉악한 경기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지지할 증거는 없었지만 나의 느낌은 확실히 그러했다. 만약 내가 옳다면 그도 나처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었다. 나는 함께 기도하고 그를 위로해야 함을 살아있는 맥박처럼 느꼈다.
고소가 접수된 며칠 뒤에 나는 진심어린 감정들을 담아 그에게 편지를 하나 썼다. 뒤에 알았지만 그의 변호사는 편지를 그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 편지의 일부는 이러하다:
…다시 한번, 당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제 아침에 들은 생각인데, 제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방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방문의 목적은 당신에 대한 나의 염려와 함께 기도하기 위한 엄밀히 사목적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같은 방문에 대해 호의적이라면 내게 연락을 주십시오. 당신이 바라면 가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11월 십 이일 금요일 전세계 거의 주요 도시의 헤드라인은 나에 대한 고발에 관한 것이었다. 아침 일찍 묵주기도를 하면서 나는 고통의 신비 첫 단, 즉 올리브 동산에서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을 묵상했다. “제 육십 오년의 삶에서 이번에 처음으로 당신께서 그 밤에 겪으셨던 고통과 번민을 진실로 제가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하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는 “왜 당신은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예전에 결코 겪지 않았던 외로움을 처음으로 느꼈다.
나는 대부분의 아침시간을 보좌관들과 보내며, 오후 1시에 있을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동안 나를 지지하는 편지와 전화들로 인해서 나의 사기는 올라갔고, 그 가운데에는 교황님으로부터 온 격려말씀도 있었다.
나의 카운슬러들은 사건의 모든 면모와 그것을 다루는데 사용할 전략을 토론했다. CNN은 매 시간마다 일요일 밤 특집 “은총에서의 추락”(Fall from Grace)을 선전용으로 방송했는데 그것은 성범죄에서 유죄로 밝혀진 사제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선전용 방송은 스티븐 쿡과의 인터뷰를 약속했다. 그와 기자가 그들이 소위 말하는 나에 대한 “증거,” 곧 책과 사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잠시 보여졌다. 인터뷰가 이미 성사되었고, 그 방송은 일년에 두번있는 전미주교회의 전날 밤에 방영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사건”을 전개시키는데 상당한 준비가 진행된 것처럼 보였다.
보좌관들과의 회의의 마지막에 나는 한시간동안 혼자서 기도하고 묵상하기로 했다. 내가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자신을 비우게 되면서 나는 놓아보내기를, 그리고 나 자신과 나의 걱정을 주님의 손에 맡기기를 원했다. 창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도시의 일상적 삶을 어렴풋이 의식하면서 동시에 창밑 도로에 다시한번 모여든 언론사 차량들의 행렬또한 느낄 수 있었다. 예정된 기자회견 십분전에 나는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나는 오전내내 좋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본능을 따르기로 난 결정했다. 나는 단지 진실을 말할 것이다.”
사목센터의 기자회견장은 거의 칠십명 가량의 북적거리는 기자들과 카메라들, 조명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전선들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을 알고 좋아했지만 그들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대자의 역할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곳에 있지 않았다. 난 단지 그들의 질문들에 진실하게 답하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마이크 단상 뒤에 서자 마치 전 세계 앞에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지독히도 혼자라고 여전히 느껴졌다. 그 순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사십이년간의 사목활동과 나의 이름, 그리고 나의 명예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한 어떤 내적인 힘이 있었고, 주님께서 그 힘을 주고 계신다고 나는 확신했다. 실은 내게 이같은 공적인 고발과 심문의 순간은 한편으론 은총의 순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보여준 큰 사랑과 지지를 느꼈기에 그것은 고통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은총의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영적 성장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지난 며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들 덕분에 나는 영적 여정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고 느꼈다.
기자회견이 중간쯤 이르자 긴장의 상태가 다소 누그러졌다. 비록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했고, 이에 따라 나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좀 덜 의심하고, 좀 덜 적대적이고, 나를 불신하기보다 좀 더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그들의 일은 조사하고 알리는 일이었지만.
그 때 첫줄에 앉아있던 어떤 젊은이가 “당신은 지금도 성적으로 활동적입니까?”하고 묻자 누그러들던 회견장의 긴장이 다시 살아났다.
나는 잠시 기자와 나 자신의 세계 사이에 있는 거대한 심연을 느끼면서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말했다. “나는 항상 정결과 독신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다시 찾아든 긴장이 누그러지면서 나는 기자들이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한참 후에 누군가 내게 말했다. “추기경님, 우리는 당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질문들을 해야만 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직업입니다.” 다음 날 시카고 트리뷴 신문(The Chicago Tribune)의 머릿기사가 나왔다. “버나딘이 말하기를, ‘나는 정결한 삶을 살아왔다.’”
회견 후에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만약 그것이 고통이었다면 그것은 수많은 고통의 첫 시작일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실제로 다음 주간동안 나는 열 네번의 기자회견을 했고, 거의 모두 비슷한 분위기와 양상을 보였다. 믿음이 약속한 것처럼 진리는 각 회견마다 내게 더욱 큰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사건이 해결되다 (The Case Unravels)
내게 가해진 잘못된 고발이 해결되는데는 백일이 걸렸다. 그 시간이 법적인 면에서 하나의 과정으로 묘사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실제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영혼을 위한 깊이 있는 가르침이었다. 실제로 모든 문제는 지난 삼년동안 나의 영적인 여정을 이루게 된 세 막으로 구성된 연극의 첫 막의 장면들이었다. 첫번째 막은 허위고발로 시작되었고, 나를 고발한 사람과의 만남과 그와의 화해로 끝이 났다. 나중에 상세하게 말할 다른 두 막은 나의 췌장암 선고와 죽음의 준비를 포함한다. 허위고발의 시기에 나는 성령께서 삼년 과정으로 시작한 가르침의 단지 도입부분에 있었을 뿐이었지만 첫 해가 끝나갈 무렵에도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비록 나 자신과 교회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를 원했지만 처음부터 나는 변호사들에게 “초토화” 방법과 같은 맞고소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하였다. 그 이유는 실제로 성적 학대를 받은 사람들이 공적으로 나서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작부터 시카고 대교구의 어떤 돈도 나 개인의 변호비용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교회에 대한 기부 혹은 헌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이 알려지자마자 다양한 법적인 문제에 있어서 대교구가 이용하고 있는 몇 몇 이름있는 변호 회사들이 무료로 나를 변호하겠다고 제안하며 나섰다.
제기된 “증거”를 면밀히 조사하자마자 나에 대한 사건은 그 자체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와 피고자의 함께 있는 “사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시내티 신학교 행사에서 찍은 단체 사진임이 밝혀졌다. 내가 서명해서 피고자에게 주었다고 제기된 책 또한 나의 서명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한 달전에 내가 성적으로 학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고소자를 도왔다던 “최면술사”는 최면술을 단지 몇 시간동안 배운 사람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왜 스티븐이 그녀에게 보내졌는지 실제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내게 분명해 진 것은 나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스티븐 쿡에게 나에 대한 피고자의 역할을 떠맡도록 강요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거의 뉴스 속보가 전해지자마자 어떤 사람들-다른 주(state)의 한 사제를 포함해서-은 마침내 나에 대한 사실이 밝혀졌다며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내가 유죄라고 주장했다. 또한 소문이 공식화되고 고소가 접수되던 밤 사이에 대교구의 사목센터의 전화가 상당부분 “침범”당했었다. 여섯 가지 다른 메시지가 남겨졌고, 사건의 영향을 받는 사무실의 근무자들이 다음날 아침에 이것을 들었다. 여섯 가지 모두의 내용은 소문이 사실이며 나를 변호하는 것이 대교구에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후에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밝히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변호사들의 전문적인 협조, 특별히 존 오말리(John O’Malley)와 제임스 셔리텔라 (James Serritella)를 통해서 나에 대한 사건의 진정한 본질은 곧 명확해졌다. 하지만 사건의 불충분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법정소송은 나의 삶을 붕괴하고 방향을 바꾸려는 힘을 가졌었다.
따라서 혼란스러운 혐의가 진실의 잣대에 맞지 않음을 알게 되자 나는 스티븐 쿡이 어떻게 이 모든 지저분한 이야기의 희생양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존재가 이용당했다는 나의 첫 직감은 점차 사실로 확인되었다. 1994년 이월 이십 팔일 스티븐은 스스로 신시내티 연방법원 판사에게 나에 대한 고소를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성 그레고리 신학교(St. Gregory Seminary)에서 문제가 있던 한 신부가 나에 대한 거짓 고발을 부추기는데 은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보다 내게 더 놀라웠던 것은 스티븐 쿡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서 점차 알게 되면서였다. 신시내티 신학교에서의 행복하지 않았던 짧은 시기 후에 그는 교회를 떠나서 문란한 성생활로 빠져들었다. 에이즈로 고통받던 그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의 한 아파트에서 친구가 돌보고 있었는데 그의 주소는 비밀로 감춰져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이었고, 목자로서 나는 그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고발자와의 만남: 용서와 화해 (Meeting My Accuser: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사건이 종결된 후에 마지막 기자회견은 첫 고발을 방송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같은 CNN에 의해서 다루어졌고, 나는 바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스티븐을 생각했는데 그는 외롭게도 병으로 인해 부모의 집과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 있었다. 십 이월 중순에 이르러 내가 목자로서 그를 찾아나서지 않고서는 이 모든 사건이 진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깊이 느꼈다. 나는 단지 그가 나를 맞아주기를 기도했다. 거짓 고발의 경험은 내가 스티븐을 만나서 화해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비록 나는 그로부터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지만 그 또한 나를 만나고 싶어할 것이라고 느꼈다.
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몰랐고 또한 그를 놀라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나는 나의 친구이자 신시내티의 주임신부인 필 세어(Phil Seher)를 통해 스티븐의 어머니 마리아(Mary)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는 답장을 보내면서 스티븐은 단지 나를 기꺼이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4년 십 이월 삼 십일 나는 스콧 도나휴 신부(Scott Donahue)와 함께 필라델피아로 날아갔다. 만남이 이루어지기로 한 성 찰스 보로메오 신학교(St. Charles Borromeo Seminary)의 원장인 몬시뇰 제임스 몰로이(Monsignor James Malloy)가 마중나와서 오버부룩(Overbrook) 외곽에 위치한 캠퍼스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눈이 쌓인 신학교를 들어설 때 나는 조금 불안했다. 전통적 양식의 큰 규모의 캠퍼스는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아서 떠난 신학생들 때문에 고요했다. 본관 2층의 크고 긴 유리창이 있는 방에서 우리는 침착히 스티븐과 그의 동료를 기다렸다. 실은 달갑지 않은 질문으로부터 나 자신을 떼 놓기가 어려웠다. 스티븐이 과연 약속을 지킬까?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친구 케빈(Kevin)과 함께 도착했다. 악수를 한 뒤에 그는 나와 긴 의자에 함께 앉았고, 도나휴 신부와 케빈은 그 의자에 양쪽 끝에 앉았다. 중병에도 그는 조금 수척해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만남을 청한 유일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내가 그에게 나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도록 함으로써 지난 겨울의 충격적 사건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티븐은 그가 초래한 당혹스러움과 상처에 대해서 사과하기 위해서 나와 만나기를 결정했다고 대답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둘 다 화해를 원했다. 그러나 스티븐은 먼저 그의 삶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 하기를 원했다.
그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오랫동안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린 신학생으로 그는 그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제에게서 성적으로 학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교회 지도자들은 사제의 잘못에 대한 그의 보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비참하고 원통해진 그는 교회를 떠났다. 한참 후에 그는 뉴저지(New Jersey)에 있는 성 학대를 한 사제들을 전문적으로 고발하는데 유명한 변호사를 알게 되었다. 스티븐은 말하기를 그 변호사가 그를 영성적으로 지도할 다른 주(state)의 한 사제와 연결시켜 주었다고 했다.
비록 스티븐은 오직 그의 신학교 교수에 대해서만 고발하려 했으나 그의 영성지도 신부는 버나딘 추기경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내가 사건에 연루가 된다면 확실히 스티븐이 교회로부터 원하는 것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영적 지도”가 법정 소송에서 다른 사제와 함께 나의 이름을 스티븐이 함께 말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한 스티븐의 어머니에게 스티븐의 행동에 협조하기를 권하면서 그녀를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꽃을 보내었다. 이 사제가 1993년 십 일월 이십 이일 시카고 라디오 쇼에서 내가 유죄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스티븐은 어떻게 엉성하게 훈련된 치료사가 내가 그를 성적학대하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었고 소송에서 나를 포함시키게 되었는지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이 부분에 있어서 혼란스럽고 불확실해 보였다. 이때 그의 친구 케빈이 끼어들더니, 그는 항상 그 변호사와 사제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나는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스티븐을 정면으로 보면서, “당신은 내가 절대로 그대를 학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하고 말했다.
“압니다,”하고 그가 조용히 대답한 뒤에 말했다.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보면서, “나는 절대로 당신을 학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스티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예, 나는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그랬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 사죄하고 싶습니다.” 스티븐의 사죄는 단순했고, 직접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나는 매일 그를 위해서 기도해왔고, 그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위태로운 건강상태에 있다는 것은 더 명확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가 그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그는 처음에 망설였다. “미사를 원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화와 절망때문에 호텔에서 여러번 기드온 성서(Gideon Bible)를 벽에 던졌다고 했다. “아마도 단지 간단한 기도가 오히려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가방에서 준비한 선물을 꺼내면서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하지 못한 채 잠시 망설였다.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가지고 온 두 가지 물건을 그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스티븐, 나는 그대에게 내가 직접 서명한 성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받기 원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이 상처를 받지는 않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이해합니다.” 스티븐이 떨리는 손으로 성서를 받고서 그것을 가슴에 갖다대자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다시 나는 가방에서 백년 된 성작을 꺼내었다. “스티븐,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으로부터의 선물입니다. 그는 내게 언젠가 그대를 위해 미사를 봉헌할 때 이것을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디,” 스티븐은 눈물이 가득차 대답했다. “지금 미사를 봉헌합시다.”
전 생애에 걸친 나의 사제직에서 그보다 더 깊이있는 화해를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말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들은 그날 오후에 일어났던 하느님 은총의 힘을 묘사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용서 그리고 치유의 명백한 표시였다.
스티븐의 친구인 케빈은 가톨릭이 아닌 그가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신학교 성당에 가서 도나휴 신부와 나는 성가정 축일(Feast of the Holy Family) 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평화의 인사 때에 우리는 서로 껴안았고, 그 후에 나는 스티븐에게 병자성사를 주었다.
그런 뒤에 나는 말했다. “모든 가족은 상처, 화 혹은 소외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가족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가족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상처로부터 화해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영적인 가족입니다. 일단 우리가 일원이 되면, 상처를 입거나 소외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한 가족입니다. 그 외에 다른 누구도 없기에 우리는 화해를 위해 애를 써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바로 오늘 오후에 하고 있는 일입니다.”
스티븐이 떠나기 전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커다란 짐을 벗어버렸습니다. 나는 치유되었고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만남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했지만 스티븐은 다시 말했다. “나도 참으로 기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화해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내게 우리의 이야기를 하도록 청했고, 나는 몇 주 뒤에 대교구 신문인 “새 세상”(The New World)에 글을 썼다. 그 전에 전화로 내가 그것을 그에게 읽어주자, “추기경님, 당신의 글은 훌륭합니다. 그대로 내세요.”하고 그가 말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그 밤에 도나휴 신부와 나는 은총의 오후가 어떤 이의 인생에 가져다 준 성령의 홀가분함을 느꼈다. 나는 바로 허위고발이 성사적 화해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놀랍도록 경험하도록 이끌어주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오직 잠시동안 잃어버린 하나의 양을 찾아서 우리(sheepfold)로 데려오는 착한 목자(Good Shepherd)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스티븐과 나는 연락을 주고 받았고, 육 개월 뒤 내가 췌장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편지는 격려의 첫번째 편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연민과 격려로 가득찬 편지를 쓸 때 그에게는 단 몇 달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팔월 말 경에 그는 나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지만 너무 아파서 성사되지 못했다. 스티븐은 교회와 완전히 화해한 채로 1995년 구월 이십 이일 그의 어머니 집에서 죽었다. 그는 침대에서 웃으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그가 교회로 돌아왔음을 알리면서 말했다. “이것은 당신께 대한 나의 선물입니다.” 그를 돌보았던 신시내티의 사제가 이것을 후에 내게 말해주었다.
Part Two: 암 (Cancer)
묵상 (Meditation):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의 고통 (Suffering in Communion with the Lord)
사목활동에서 나는 예수님의 메시지, 그 삶의 사건들, 그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중점을 두어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어느때보다 더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통에 대해서 중점을 둔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할 뿐만 아니라 속죄와 삶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이셨다. 그는 우리처럼 고통을 느끼셨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깊은 아픔과 고통과 겪으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그는 인간의 고통을 어떤 위대한 것으로 변화시키셨다. 그것은 고통받는 이와 함께 걸을 수 있고 자신을 비울 수 있는 힘으로, 이로인해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해 더욱 온전히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그 신비를 깨닫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떠올려볼 때 많은 관점들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지만 나는 오직 한 가지만을 강조하고 싶다. 십자가의 핵심적인 신비는 일종의 고독함과 무능력함을 살아나게 한다는데 있다. 일이 진행되는 것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는 무능력,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진실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일종의 버려진 느낌, 이러한 고독의 절정이 예수님의 외침 속에 나타나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마태 27:46) 만약 주님이 아픔과 고통을 체험하셨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가 그보다 덜 한 것을 바랄 수 있을까? 그럴수는 없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고통을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자된 이와 주님의 제자가 아닌 이들의 고통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 바로 그 차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고통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치조차도 예수님께서 겪은 고독과 버려진 느낌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않는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와 구속적인 가치를 이해하면 이는 사목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고통은 이와 관련해서 우리를 엄밀하게 시험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우리가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과 함께 하거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함께 걷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 종종 분명해진다. 이 사실은 우리를 상심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조종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과 함께 하거나 기도를 통해서 실제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에 대한 침묵의 표징이 되는 것 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기도를 통해 응답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고통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이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예수님의 고통,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의 참여가 확실한 자유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놓아보냄의 자유, 우리 자신을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포기하거나 그의 손에 내맡기는 자유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승리하시리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온다. 우리가 자신과 다른 이에게 더 집착할수록,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맘대로 할려고 하면 할수록, 곧 우리 삶의 실제 의미를 더 잊을수록, 우리는 이 모든 것의 부질없음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놓아보냄,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에로 향하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차지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참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포기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경험하고, 육체적이고 심적이며 영적인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삶, 평화, 그리고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이전에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주님의 효과적인 도구가 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예수님 고통의 신비, 깊이, 그리고 목적이 우리 각자의 삶의 한부분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할려면 우리는 먼저 고통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단순히 우리와 같은 인류로부터 떨어져서 잘 살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시간은 바로 다른 이를 위해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고통받는 시간이다. 예수님처럼 어둠의 골짜기, 곧 육체적 아픔, 도덕적 갈등, 압제적 구조와 억압받는 권리의 어둠의 골짜기를 함께 걸음으로써만이 우리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다.
새로운 삶 (New Life)
지난해 지극히 감동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한 뒤에 자유로운 사람으로 1995년을 시작하였다. 무거운 짐을 내 어깨에서 내려놓자 나는 어느때보다 더 자유로움을 느꼈다. 내 안에서 허위 고발의 시기에 대해서 글을 쓰기를 원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오랜 기도 뒤에 계속해서 나의 삶을 단순히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시련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게 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조차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지난 몇 달동안 그 어느때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차지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비웠다. 그 결과 스티븐 쿡과의 화해로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그것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따라서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열정과 확신으로 계속해서 사목을 해 나가야 했다.
친구들과 보좌관들은 이러한 변화를 목격했고 얼마나 내가 변했는지를 언급했다. 거의 일년만에 처음으로 그동안 미루어졌거나 포기되었던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따라잡기를 시작하자 나는 속도감을 느꼈고, 다가오는 몇 달 동안은 엄청나게 바쁜 일정을 각오해야 했다.
일월과 삼월 사이에 세번에 걸친 국제여행을 했다. 첫 여행은 필리핀으로 ‘포르노를 반대하는 종교연합’ (the Religious Alliance Against Pornography: RAAP)의 첫 국제회의였다. 나는 그 모임의 공동설립자이며 공동의장이었다. 우리 단체는 사람들에게 아동 포르노의 사악한 면모를 알리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나라들에서 우리의 도움을 청해왔다. 우리는 국제회의를 열기로 하고 모임의 장소로 마닐라를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은 환태평양 지역에 걸친 수많은 아동학대, 아동 포르노, 그리고 아동 성매매의 중심이었다.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이월달에는 다양한 교회의 주제들, 즉 삼쳔년기 교회의 미래, 젊은이와 교회와의 관계, 사회관용과 교회, 그리고 일관된 생명윤리에 대해 그곳 주교들이 강의를 요청하였기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 갔다. 실은 처음으로 그 두 나라를 방문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다행히 강의들 사이에 시간이 있었고 여행을 할 수 있었기에 즐거운 경험이었다. 여행기간내내 이같은 활력과 사목활동에 대한 새로운 헌신에 대해 계속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기간동안 여행의 절정은 삼월에 있은 시카고 지역 가톨릭과 유대인 대표자들을 이끌고 생애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를 여행할 때였다. 우리는 시카고에서 가톨릭과 유대교 공동체 사이에 이십 오년도 넘은 대화의 관계를 축하했다. 이스라엘 서안(the West Bank)과 가자(Gaza) 지역을 함께 방문함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종교적 뿌리를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어떻게 유대인과 가톨릭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삼월 이십일 여행을 떠나기 몇 시간전에 나는 새로운 세 명의 보좌주교를 홀리 네임 주교좌 성당(Holy Name Cathedral)에서 축성했다. 그 장엄한 예식 후에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여행길에 올랐다. 방송매체는 이 여행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요 텔레비전, 신문, 그리고 라디어 방송은 소식을 시카고에 전했다. 방송과 기사들은 모두 긍정적이었다. 열흘간의 여행기간동안 대표들과 나는 예루살렘 라틴예식 총대주교 미셀 사박(Michel Sabbah), 이스라엘 대통령 에제르 와이즈만(Ezer Weizman), 이스라엘 수상 이츠학 라빈(Yitzhak Rabin),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베들레헴 시장 엘리아스 프레이즈(Elias Freij),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디오도루스 1세(Diodorus 1), 팔레스타인 대통령 야써 아라파트(Yasir Arafat), 교황대사 코르데로 란자 디 몸테제몰로(Cordero Lanza Di Momtezemolo) 대주교와 예루살렘 시장 에후드 올메르트(Ehud Olmert)를 만났다. 때론 대화 가운데 긴장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대를 받았다.
이번 성지순례가 너무나 감동적이었기에 나는 언젠가 순례자로, 곧 개인자격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다짐했다. 언제나 보도매체들로 가득찬 많은 공적인 일정들 때문에 나는 예수님께서 살고 사목했던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모든 준비를 했으나 지금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예수님께서 살고, 사목했고 돌아가신 곳을 보았다는 짤막한 기억과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성서와 그곳에서 사용된 이미지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스라엘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부활절을 준비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나의 삶의 이 순간에 기념하는 것은 더없이 옳은 것처럼 여겨졌다. 나 역시 심각한 허위고발의 심연에서 부활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겪은 지극한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승리한 신비는 내게 더 깊은 의미를 가져왔다. 예전에 수없이 해 왔던 것처럼 나는 부활을 앞두고 며칠 동안을 깊이있는 아침기도의 묵상 시간으로 보냈다. 그래서 예수님을 좀더 이해하고 사제로 주교로 나의 일을 좀더 효과적으로 하기를 바랬다.
사목활동의 바쁜 일정은 오월과 유월에도 계속되었다. 유월은 더없이 바빴지만 칠월에 휴가를 가질 계획이었으므로 나는 빠른 일정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휴가로 북부 이태리에 있는 나의 친지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유월 초에 하느님은 나를 위한 다른 계획이 있음을 드러내셨다.
진단: 암 (Diagnosis: Cancer)
유월 삼일 토요일 나는 소변색이 다소 바랬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내가 먹은 음식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일요일과 월요일에도 계속되었다. 그날 오후에 나는 시카고에 있는 퀴글리 대주교 신학교(Archbishop Quigley Seminary)에서 외교대사들(the Consuls General)을 위한 미사를 주례하였다. 미사 후에 나는 친구인 스캇 도나휴(Scott Donahue) 신부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우리가 저녁 열 시경에 숙소로 돌아왔을 때 지나가는 말로 그에게 나의 소변색이 다소 바랬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의사에게 연락을 취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내가 전화를 걸겠다고 말을 했지만 이를 믿지 못한 그는 “추기경님께서 전화를 하시기 전에는 저는 오늘밤 이 집을 떠나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주치의이자 머씨 병원(Mercy Hospital)의 병원장인 워렌 푸레이(Dr. Warren Furey)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했다. 그는 다음날 내가 일하는 대교구의 사목센터(the Pastoral Center of the Archdiocese)에서 가까운 그의 사무실이 있는 노스웨스턴 메모리얼 병원(Northwestern Memorial Hospital)에서 소변겸사를 하도록 약속을 잡아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는 없겠지만 간호사가 돌보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다음날 나는 약속을 잊어버렸다. 나의 비서인 앤 맥카힐 수녀(Sr. Ann McCahill)가 오전 11시에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고 말했을 때에서야 그것을 떠 올렸다. 그제서야 소변검사를 기억해 낸 것이다.
나는 노스웨스턴 병원으로 부담없이 걸어갔다. 여름날씨는 좋았고 몇 분이라도 사무실을 벗어나는 것이 좋았다. 간호사는 내게 인사한 뒤에 테스트를 도와 주었고, 결과가 나오는대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그 일을 잊어버리고 오후 다섯 시까지 일했다.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앤 수녀가 나를 좇아오더니 “푸레이 의사가 추기경님과 지금 통화하고 싶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그래서 사무실로 돌아가 전화를 들고는 말했다. “워렌, 아마 검사결과 때문이겠지요.” “예” 그는 말했다. “추기경님의 소변에서 빌리루빈(biliruben)이 발견되었습니다.” “워렌, 빌리 루번(Billy Ruben)은 누구며, 그는 내 소변에서 무얼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농담삼아 말했다.
푸레이 의사는 빌리루빈은 종종 폐색증(obstruction)을 가르키는데 내게 머씨 병원으로와서 정밀검사를 받자고 말했다. 나는 다음날 수요일 아침 여섯시에 미네소타(Minnesota)에 있는 세인트 폴(St. Paul)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가톨릭 건강협회(the Catholic Health Association)를 위해 미사와 강론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목요일은 어떤가요?” 그는 내게 물었다. “오전 아홉시부터 일정이 꽉 찼는데”하고 내가 대답했다. “문제 없습니다. 제게 한시간 반만 주십시오. 오전 일곱시 반에 오시면 아홉시까지 사무실로 돌아가시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다음날 오전 일곱시 반에 나의 친구인 케니스 벨로 몬시뇰(Monsignor Kenneth Velo)과 함께 머씨 병원에 운전을 해 갔는데 그날 저녁 여섯시까지 나는 집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날 하루의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다. 켄과 같이 나 역시 푸레이 의사의 얼굴을 보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정밀검사(CAT scan)와 피 검사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때에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푸레이 의사는 웨스턴 병원의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ERCP(Endoscopic Retrograde Cholangio Pancreatography) 검사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yes였다. 우리는 오후 두 시에 도착했고, 마취를 할 때에도 나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결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의사는 혈관에 투입하는 작은 튜브를 넣어 곧 내게 암 종양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약 두 시간뒤에 나는 깨어났다. 푸레이 의사, 로버트 크레이그 의사(Dr. Robert Craig)와 몇 몇 사람들 그리고 켄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는 물었다. “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물을 때 절망적인 느낌이 나를 휩쌌다. 지난 허위고발 뒤에 내 삶을 찾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다시 나의 삶과 나의 몸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그 때를 회상하면서 나는 하느님과 나를 위한 그의 계획을 생각한다. 동시에 커다란 걱정으로 의사로부터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듣기 위해서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제서야 깨닫게 되지만 푸레이 의사에게 검사 결과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놓아보내야만 했다. 다시한번 더. 하느님은 다시 나를 가르치고 계셨는데 얼마나 미미하게 우리가 스스로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그를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그 순간에도 하느님이 절실했다.
“추기경님은 췌장에 종양을 가지고 계십니다.” 푸레이 의사가 말했다. “그래요? 그것이 악성일 가능성이 있나요?” 나는 물었다. 눈을 피하지 않고 의사는 “구십 구 퍼센트 이상입니다.” “그럼, 내게 큰 문제네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들도 동시에 “예, 추기경님은 지금 큰 위험에 계십니다.”
우리는 금요일에 다시 머씨 병원으로 돌아가도록 약속을 잡았다. 푸레이 의사는 내게 이런 종류의 암이 제때에 발견된다면 어떤 수술을 하는지를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는 어떤 병원과 의사가 이 분야에서 최고인지 그리고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내게 확신을 주었다. 몇 가지를 상담한 뒤에 푸레이 의사는 수술을 위해서 멀리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제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일리노이 메이우드(Maywood, Illinois)에 있는 로욜라 병원(Loyola Medical Center)의 제럴드 어렌하 의사(Dr. Gerard Aranha)가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몬시뇰 벨로와 나는 로욜라로 운전을 해서 갔다. 우리가 가까이에 이르자 로욜라 대학 암센터(Loyola University Cancer Center)라는 커다란 표지를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언제나 암을 무서워했고 심지어 그 말조차 사용하는 것을 종종 꺼려했다. 나는 켄에게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게 맞나요?”하고 물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어렌하 의사와 암센터의 대표인 리차드 피셔 의사(Dr. Richard Fisher)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내게 “휘플(Whipple)”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들이 그것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때 어렌하 의사가 말하기를, “추기경님께서 운이 좋으시다면 이 수술은 오래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당히 짧을 것입니다.” 언제가 좋으냐고 내가 묻자 그는 단호하게 “빠를수록 더 좋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가장 좋겠습니다.” 나는 주일 오후에 병원으로 와서 월요일 아침 수술을 준비하기로 했다.
다른 이야기: 나의 아버지 (An Aside: My Father)
내가 암에 걸렸다는 심각한 현실을 더 깊이 받아들일수록 나의 아버지 주세피 조셉 버나딘(Giuseppi Joseph Bernardin)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 마리아(Maria)와 결혼한지 단지 칠년이 지난 1934년에 그도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난 여섯 살이었고 나의 누이 일레인(Elaine)은 두 살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우리 가족 세 명은 함께 살면서 생활을 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들의 고향인 이태리의 토나디코 디 프리메로(Tonadico di Primiero in Italy)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콜롬비아(Columbi, South Carolina)로 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희망과 꿈을 가지고 왔고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며 살았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암이 환자만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가족과 친구들의 삶까지도 완전히 바꾼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난 나의 아버지를 다시 떠올리는데 그는 위대한 존엄으로 암과 싸운 용감한 사람이었다.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는 것은 가장 아픈 순간에도 그가 가족을 위해서 수없이 사랑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내가 네 살 혹은 다섯 살이었을 때 일어났던 일이 기억난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우리 가족은 친구를 방문했었다. 아버지는 그 즈음에 왼쪽 어깨에 암과 관련된 수술을 받았고, 그는 하얀색 짧은 셔츠 아래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친구집 현관에 있는 쇠난간에 앉아있던 나는 뒤로 넘어져 땅에 부딛친 후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즉시 난간을 넘어 나를 들어올리셨다. 그가 나를 그의 팔에 안았을 때 셔츠를 통해서 피가 배워져 나왔다. 그는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을 채 오직 내가 괜찮기를 바랬다.
아버지가 병을 이기고 가족과 친구들과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힘은 나 역시 같은 일을 하도록 북돋운다. 나는 아버지가 어린 내게 그러한 가르침을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 오늘 그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내 안에서 살아있음을 알고 있다.
“가족”과 소식을 나누다 (Sharing The News With My “Family”)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뒤에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기자 회견을 열어 사람들, 특히 내 가족에게 나에게 말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까?”하고 그들이 물었다. “예, 나는 당신이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이런 종류의 수술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그들이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나는 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나는 사람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아무 말없이 내가 입원을 한 뒤에 여덟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는다면 도대체 방송에서는 나중에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날 오후 유월 구일에 나의 건강에 관한 첫번째 기자회견이 사목센터에서 열렸다. 대표 보좌관인 메리 브라이언 코스텔로 수녀(Sr. Mary Brian Costello)는 머씨 병원에서 중대한 수술로부터 회복 중이었고, 총대리인 레이몬드 고더트 보좌주교(Bishop Raymond Goedert)는 사제피정을 지도하던 일리노이 주의 벨레빌(Belleville, Illinois)에서 시카고로 급히 돌아와야 했다. 고더트 주교는 내가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고 언론에 이야기 했다. 푸레이 의사는 병을 상세히 설명했고 질문에 대답했다.
그 기자회견은 많은 회견의 첫 시작일 뿐이었다. 시카고 대도시와 여러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속보다 나의 속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첫 기자회견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그것을 보았을 때는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생생한 그림을 통해서 내가 아주 공격적인 암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오년 동안 살 확률은 단지 넷이나 다섯 사람의 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그 주말에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대교구를 고더트 주교에게 맡기는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나는 계속해서 내게 물었다. “이게 정말인가? 이게 사실인가?” 그럼에도 나는 활기가 있었다. 어찌되었던 주님께서 내게 필요한 힘을 주셨던 것이다.
나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고, 특히 나의 누이 일레인 에디슨(Elaine Addison)은 즉시 시카고로 올 계획을 세웠다. 토요일과 일요일 내내 나는 수술을 하기 전에 시카고 대교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다. 병원으로 떠나기 한 시간 전인 주일 오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 나에 관한 소식을 들었고 그와 모든 신자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성하께서는 고통의 구원적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에 나는 진실로 어떤 고통이든지 교황님과, 보편교회 그리고 지역교회와 사제들, 그리고 시카고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 통화 후에 켄 벨로와 나는 집을 떠나 로욜라 병원으로 향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방송매체들이 병원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병원 입구에서 준비에 없던 기자회견을 했다. 첫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러했다. “추기경님, 허위고발과 암판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힘들고 충격적입니까?” 나는 “허위고발입니다”하고 즉시 대답했다. 그들이 설명을 해 달라고 해서 나는 허위고발은 악의 결과로서 나의 신뢰성과 신자들을 이끄는 능력을 파괴해 나의 존재 전체를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암은 병으로 도덕적 악과는 무관하며 인간 조건의 한 부분으로 그것이 아무리 심각하다 하더라도 허위고발의 정신적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술 (Surgery)
병원에 입원하자 나는 일련의 검사를 거쳐야 했다. 켄과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그는 내 방 건너편으로 함께 들어와 움직이는 작은 제대를 하나 준비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수술동안 내게 일어날 것을 영적으로 준비하기를 원했고, 그날 아침에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주님과의 깊은 일치에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오전 여섯 시 삼십분에 수술실로 들어간다고 들었기 때문에 나는 다섯 시 반에 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오전 여섯시에 고더트 주교와 도나휴 신부와 함께 나의 누이가 도착했다. 분위기는 상당히 밝았다. 그러나 여섯 시 반이 되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검사를 하기 위해서 들어왔지만 나를 수술실로 데려가지는 않았다. 그러자 시계침이 돌아갈수록 긴장이 높아졌다. 일곱 시 십오분이 되자 소소한 이야기거리마저 떨어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켄이 말했다. 그는 곧 큰 웃음을 지으면서 돌아와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추기경님. 의사가 오고 있는데 좀 늦은 모양입니다. 그는 지난 밤 음주운전 혐의로 붙잡혔답니다.” 그의 농담이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었다. 우리는 모두 웃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 모습이었다!
다음에 기억하는 것은 내가 회복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켄이 서 있었다. 잠시 멈칫하더니 그가 말했다. “추기경님, 아주 길고 오랜 수술이었습니다.” “Deo gratias-주님을 찬미합니다”하고 말한 뒤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난 단지 하룻밤을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그 뒤에 내 방으로 보내졌는데 거기에서 나는 중대한 수술 뒤에 겪는 고통을 경험했다. 기도하고자 했지만 몸의 불편은 생각한 이상이었다. 나를 방문한 친구들에게 한 말이 기억난다. “건강할 때 기도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아플 때까지 기다린다면 기도를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놀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몸이 너무 불편해서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나의 믿음은 여전하지만 나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기도를 하기에는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습니다. 건강할 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난 기억할 것입니다.”
그 뒤로 기도는 그 어느때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난 순간들을 찾아냈을 때에야 나의 마음과 몸, 그리고 정신이 주님께 집중할 수 있었다. 기도가 그리스도인, 곧 신앙인으로 우리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데는 많은 장애가 있다. 때론 삶의 일상적 사건들이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플 때 모든 것이 변한다. 나는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최선의 순간에 건전한 기도 삶을 발전시켜야 그것이 약한 순간에도 유지될 수 있다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다른 이야기: 나의 어머니 (An Aside: My Mother)
나는 일찍이 나의 아버지가 암을 대했던 방법이 나의 암을 받아들이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아버지와 나의 연관성을 이야기 했었다. 어떻게 내가 암 사목을 시작했는지 이야기 하기 전에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마리아 시미온 버나딘(Maria Simion Bernardin)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 하고 싶다. 나의 어머니는 거의 아흔 두살까지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노인들을 위한 가난한 자의 작은 자매회 센터(the Little Sisters of the Poor Center for the Aging)에서 살았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는 일레인과 나를 양육하기 위해서 제봉사 직업을 얻었다. 그녀는 어머니이자 아버지가 된 것이다. 나의 유년시절과 인생에서 어머니의 강인함은 힘있는 가르침이었다. 열심히 일한 댓가는 돌아왔고, 사랑은 헌신과 자신을 비우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과 가치는 올바른 가족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다.
유년시절의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에 하나는 어머니가 이태리로부터 가져온 사진첩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와 함께 앉아서 각 장에 있는 사람과 장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후에 나는 혼자서 사진첩을 넘기며 각 사진에 담긴 자세한 것까지 되새기곤 했다. 마침내 1957년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토나디코(Tonadico)로 처음 갔을 때 나의 나이는 스물 아홉이었다. 놀라웠던 것은 난 즉시 집에 온 것처럼 여겨졌고, 사진들 때문에 마치 내가 그곳에 살았던 것처럼 느꼈다! 그 뒤 여러차례 토나디코로 돌아갈 때마다 항상 집에 온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가족의 소중함을 일레인과 내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난 항상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겼으며, 나의 마음은 그와 같은 경
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가족은 혈육 이상의 것으로 믿었다. 가족은 사람들의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며, 우리는 가족처럼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어느 가족처럼 우리 역시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다.
수술 뒤에 회복하는 동안 계속되는 치료와 검사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면서 수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암이나 다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나의 아버지를 돌보며 그의 죽음 뒤에 우리를 돌보던 바로 나의 어머니의 얼굴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강인함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함께 할 때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내가 다른 암 환자들과 병든 사람들에게로 관심을 두기 시작하자 어머니가 강인함과 따뜻함으로 내게 가르쳐 준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암 사목활동을 시작하다 (My Cancer Ministry Begins)
병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에만 중점을 두게 된다.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을 하거나 상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지, 곧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채움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으며, 그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함께 걷고자 열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회복하는 동안 그리고 화학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위해 계속되는 병원방문에 수없이 이야기 해 온 암 사목활동의 시작이었다. 암 환자들과 병든 이들을 위한 이 특수 사목에 대해서는 이 책의 후반부에 자세히 말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하고 싶다.
수술 후 하루나 이틀 뒤에 병원에서 나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 내 방에서 그 다음에는 복도로 걸어나갔다. 나는 바퀴가 달린 “나무”에 숫자 사가 있는 장비를 가지고 걸었다. 내가 걷고 있을 때 간호사는 다른 층에 백혈병 치료를 받고 있는 아만다(Amanda)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다고 내게 말했다. 그 아이는 내 수술에 관한 모든 TV 소식을 보면서 엄마에게 “교황님의 사람”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가톨릭은 아니지만 그 할아버지와 똑같이 암을 가지고 있으니 그 교황님의 사람을 보고 싶다”라고 하면서. 나는 층을 벗어날 수가 없었기에 그 아이에게 내가 받은 많은 선물 가운데 곰 인형과 꽃다발을 보내주었다.
다행히 같은 층에 있는 다른 환자들은 방문할 수 있었다. 나는 매번 많은 영양제를 달고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방문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옆방의 사랑스러운 젊은 여자가 죽었다. 그녀는 심각한 상태의 백혈병을 앓고 있었고 철저히 격리된 방에서 마지막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두 명의 예쁜 아이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남자애고 다른 하나는 여자애였다. 물론 그녀는 최대한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했다. 내가 그녀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은 그녀의 양 쪽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계속된 방문의 첫 시작이었다. 병원을 떠난 뒤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고, 그녀가 죽었을 때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내가 방문했던 다른 환자는 젊은 아버지였다. 그는 얼마전에 암 선고를 받은 잘 생긴 젊은이였다. 나는 그와 의미있는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까운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그가 자살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암에 걸린 상태에서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그와 함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아팠다.
병원을 떠난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헌신했다. 우리는 서로를 도왔다. 나의 꼬마 친구 아만다는 여전히 정기적으로 화학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몇 주 전에 내가 로욜라에 피 검사를 하기 위해서 갔을 때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아름다운 편지를 남겨두었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워나갔다. 실은 지난 해 동안 그녀의 글쓰는 맵시가 상당히 나아졌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Part Three: 먼저 사제로, 그 다음에 환자로 (a priest first, a patient second)
묵상 (Meditation): 섬기는 자로서 (as Those Who Serve)
착한 목자(Good Shepherd)를 모델로 하는 사목신학은 그 자체로 단순하고 심오하다. 먼저 사람들의 일상과 나날의 삶에 다급한 것들을 함께 고려하므로 단순하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이유에서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목자와 양떼 모두를 넘어서는 만남으로 하느님과의 더 깊은 일치에로 나아가기에 심오하다.
목자로서 사제로서 예수님은 진정한 삶을 시작하셨다. 그는 방랑자였다. 그는 사무실, 사무시간, 비서, 컴퓨터나 팩스가 없었다! 그는 잘 닦인 길이나 돌아가는 길이나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 걸었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그에게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병을 치유받거나, 궁금즘의 답을 찾거나, 논란을 잠재우거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거나, 혹은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를 바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돌보며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체험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목자 혹은 사제가 된다는 것의 핵심이다. 곧 진정한 사목으로 사람들이 살아있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목이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중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종종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고는 했지만 결코 그의 길을 잃지는 않았다. 때로는 그의 일이 그의 잠을 방해하기는 했지만 그의 기도는 아니었다. 지난 수 십년동안 나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의 사목활동이 모든 곤란과 장애, 곧 그의 삶과 사목을 방해하는 세상의 모든 “어지러움”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바른 길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안기 위해 손을 펼쳤을 때와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을 껴안기 위해 손을 펼쳤을 때와 똑같은 하나의 것임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 아버지의 치유와 구원의 사랑을 인류에게, 그러나 한 번에 한 사람씩 전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우리 가운데 인내하는 사랑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여행 가운데 만났던 어느 누구도 절대로 방해나 훼방, 혹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가 그를 세상에 보낸 임무를 성취하기 위한 기회였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그의 삶과 사목의 가장 핵심적 의미였다.
예수님께서 성지주일(Palm Sunday)에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기 전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그의 두 아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청하였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바로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속량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마태 20:27-28). 실제로 죽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첫째가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주인은 종이 되어야 한다…나는 너희 가운데 너희를 섬기러 왔다” (루가 22:26-27).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에게 섬김의 놀라운 예를 보이시며, 그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 명하셨다 (요한 13:1-16). 그는 또한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35).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후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말씀(Last Discourse)에서 이를 설명해 주신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다음날 스스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착한 목자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은 나의 사제직과 주교직의 가장 핵심이다. 이것이 바로 “섬기는 사람으로서”를 모토로 삼아 나의 주교 문장(coat of arms)에 새긴 이유이다. 이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령인 교회 주교의 사목적 역할(Second Vatican Council’s Decree on the Pastoral Office of Bishops in the Church)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버지이자 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주교는 섬기는 자로서 (내가 강조한 부분), 그의 양떼를 알고 양떼 역시 그를 아는 착한 목자로서, 모든 이를 위한 그의 사랑과 훈육에 있어서 뛰어난 진정한 아버지로서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한다.”
이러한 섬김은 때론 아주 단순하다. 대주교로서 본당에 사목 방문을 할 때 나는 항상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불행하게도 어느 본당에서나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환영식에 참석할 때 나는 모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한 번에 단 한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그들이 한사람 한사람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도록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들을 여전히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추기경님을 몇 년전 제 본당에서 만났을 때…”
어쨌든 당신이 눈맞춤을 할 때 비록 수백명의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을 때라도 당신이 그들을 정말 아끼고 돌보는 그 특별한 순간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할 때 당신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사람들은 당신과의 특별한 친밀함에로 들어갔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들은 당신이 진정으로 그들을 보살핀다는 것과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지 주님의 사랑, 자비 그리고 연민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달리 말하면, 만남은 종교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이것은 각각의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일치와 관계를 증진시킨다.
암 환자들을 위한 새로운 사목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것이었다. 이것은 암환자로서의 나의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평범한 상황에서 자라났고, 나를 암환자들의 광범위한 공동체에로 이끌어 주었으며 또한 생명의 주님께도 가까이 가게 해 주었다. 동시에 새로운 사목은 나의 삶, 곧 나의 사제직의 본질과도 온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기: 사제직 (Heeding God’s Call: The Priesthood)
고등학교 삼 학년 때에 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University of South Carolina)의 장학금을 받았다. 그것은 상당히 영예로운 일이면서 돈이 부족한 나의 어머니, 누이와 나에게는 좋은 교육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내가 우리 가족에서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설레였다.
나는 의과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며, 사람을 돕고 동시에 안정적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를 위한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일 학년 여름에 나는 본당지역의 젊은 사제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내게 큰 관심을 보이며 혹시 사제직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 내게 물었다. 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왔다. 그들은 내게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그들을 보살피고 싶다는 것을 가르킨다고 했다. 나아가 사제가 됨으로써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젊은 사제들을 존경했으므로 그들이 내게 한 말을 되새겼다. 그러자 거의 동시에 신학교에 들어가기를 결정했다. 물론 어머니는 나의 결정이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어머니는 또한 장학금을 포기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며, 만약 신학교가 맞지 않으면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어쨌든 가기로 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셨고 나는 응답해야 했다.
나는 켄터키(Kentucky)에 있는 성 마리아 대학과 볼티모어에 있는 성 마리아 신학교,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가톨릭 대학 신학부(Theological College at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952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콜롬비아에 성 요셉 성당(St. Joseph Church, Columbia, South Carolina)에서 챨스톤 교구(Diocese of Charleston)를 위해서 서품을 받았다. 그곳에서 십 사년동안 나는 네 명의 주교들 밑에서 다른 역할을 맡으며 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의 젊은 신부들이 사제직에 대해서 말한 것, 곧 나의 일을 통하여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음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1966년에 나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아틀란타의 보좌주교(Auxiliary Bishop of Atlanta)로 임명되었다. 그때에 나는 미국의 가장 젊은 주교가 되었다. 이 년 뒤에 미국주교회의와 미국가톨릭회의의 사무총장(General Secretary of the National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and the United States Catholic Conference)으로 선출되었고 워싱턴으로 옮겨갔다. 그 기간동안 나의 책임과 의무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러자 나는 더욱 교회에 필수적인 행정적인 일에 관여하게 되었고, 이것은 나를 일상적인 삶과 사람들을 위한 염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1972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나를 신시내티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거의 십년동안 오하이오 주의 관목구(Ohio Metropolitan See)로 일하는 동안 삼년임기(1974-1977)의 미국주교회의와 미국가톨릭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198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시카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육 개월 뒤에 추기경으로 축성되었다.
시카고에서의 지난 십 사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이 즈음에 생명에 대한 일관된 윤리(Consistent Ethic of Life)의 필요에 대해서 처음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백 삼십만의 가톨릭 신자들을 사목하는 1,800명의 사제들과 함께 일하며, 레이크와 쿡 카운티(Lake and Cook counties)의 1,411스퀘어 마일 안에 있는 48개의 고등학교와 281개의 초등학교, 6개의 대학과 19개의 병원과 3개의 대교구 신학교를 돌보았다.
나는 사제로서 하느님 뜻의 도구로 그의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향한 사랑과 친밀한 관계의 도구로 불리었다. 나의 사목활동을 통해서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 사제직의 기본 정의와 기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또한 내가 여기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십년 전과 똑같다는 말을 한다. 그 시절에 나는 더 순진했지만 세상은 그때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의 교회는 모든 것이 획일적이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리 사제들은 자신의 역할에 익숙했거나 적어도 사람들이 무엇을 우리에게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나를 잘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데 동의한다. 난 항상 사람들을 돌보아왔다. 항상 사람들과의 화해를 위해서 하느님 치유의 사랑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애썼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사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이해한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사제들에게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적극적 역할, 곧 그의 사랑을 충실히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우리가 정치가나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교회나 교구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갈등에도 관심이 없다. 대신에 사람들은 우리가 단순히 그들 삶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비록 조직이 중요하고 교회 역시 사업이 필요한 인간 조직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조직 구조가 사제가 해야만 하는 사람들과의 진실한 일을 불투명하게 하고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지난 해처럼 어느 때보다 내가 사제답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첫 화학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거치면서 이제 나의 사목에 있어서 새로운 우선순위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좌관에게 말했다. 즉 아픈 사람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떤 훌륭한 다른 일을 우리가 하던지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사목자에게 다른 것을 원한다. 특별한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세상을 넘어서는 존재와 만나고 싶은 깊은 갈망이 있다. 그리고 사목자들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단순한 선행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끌리고 가장 기억하는 것들은 작은 관심과 배려이다. 수 십년이 지나도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그들의 사제와 사목자들에게 대해서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암환자들을 위한 “비공식 원목사제” (“Unofficial Chaplain” To Cancer Patients)
로욜라 병원에서 나와 같은 층에 있던 환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했던 일은 그 후로 훌륭면서도 활기를 북돋우는 사목으로 자라났다.
1995년 유월 십구일 월요일에 병원을 나갈 때 나는 로욜라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내 마음에 안고 떠났다. 그 날은 여러면에서 감동적이었는데 왜냐하면 특히 시카고와 온 세계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격려 덕분이었다. 여느때처럼 방송매체는 병원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혼자 걸어나가고 싶었지만 병원 규칙은 중대한 수술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휠체어를 타고 나가야만 했다. 그날 찍은 대부분의 사진들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였지만 일단 문에 당도했을 때 나는 일어나서 걸었다. 솔직히 그 전 주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난 모든 것을 잘 해내었다.
수술 후 암치료는 칠월 십일까지 시작되지 않았기에 기운을 회복하는데 삼 주의 시간이 있었다. 칠월 십일에 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십 삼년 전 그 날에 내가 시카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그 날은 확신과 희망의 날로 나는 대교구의 사람들을 신뢰했다. 그래서 같은 확신과 희망의 정신으로 나는 암치료를 시작했다.
시간이 생길때면 내가 언제나 즐기는 것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웃동네를 걷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한 두 블럭을 걸었지만 점차 예전의 길로 늘여서 나의 집에서 시카고 강(the Chicago River)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약 4 킬로미터를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에 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다가오는 치료를 준비하는 동안 나를 격려하는 편지, 팩스, 그리고 전화가 쏟아졌다. 암 환자들과 다른 병으로 심각하게 앓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
곧 친구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나는 조언이나 영적지도의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곧 방송매체는 이것을 알았고 내가 하는 일을 방송했다. 그 후에 나의 암 사목은 정말 자라났다! 나는 조용히 암 환자들을 위한 “비공식 원목사제”가 된 것에 대해서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사람들이 내게로 올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암과의 싸움을 겪은 사람들의 용기와 깊은 믿음에 나는 계속해서 감동을 받았다.
특별한 공동체 (A Special Community)
사제직을 통해서 나는 언제나 사랑과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서면서 믿음을 증거하는 나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 역시 인류 공동체의 온전한 한 부분이다. 곧 그들의 한 형제로서 말이다. 하느님의 종이기 때문에 나는 더 자유롭게 각기 독특한 성격을 지닌 다른 많은 공동체에 속할 수 있었고, 또한 더 큰 인류 공동체와의 연대성도 강조할 수 있었다.
암 사목을 통해서 나는 지금 내가 속해있는 독특하고 특별한 공동체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암과 다른 중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삶이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되었고, 갑자기 부차적인 것에서 핵심적인 것을 쉽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다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나의 개인적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들과 하나되고 이해받는 것이 중요하다.
삶을 위협하는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삶에 대한 성찰을 나눌 때 놀라운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진실한 인간으로, 진정한 현인으로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과거의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힘들어 했었다. 그러나 내가 암을 가졌다고 진단을 받은 후에는 말이 참으로 쉽게 나왔다. 마찬가지로 언제 듣고 어느때 손을 내미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의 병을 통해서 내가 아는만큼 나의 건강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었다. 나의 가족은 시카고 지역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또한 미국과 세계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의 가족은 내가 어떤지를 알 권리가 있다.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말해왔다. 내가 나의 암에 대해서 공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한 결정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플 때 자신속에 갇히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실은 그 때가 우리가 가장 사람들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방송매체들과 사람들은 나를 거룩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난 이것을 들을 때는 마음이 편치않다. 나는 다만 공적으로 솔직하게 나의 삶을 주님과 교회, 그리고 인간 공동체에 헌신하도록 노력해 왔을 뿐이다. 지난 삼년처럼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를 강하게 만든 시련은 결코 없었다. 실은 나의 믿음이 행동을 통해 내 삶을 이끄는 원칙을 내가 직접 살게 된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형제와 친구로 그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암에 대해 공적으로 알리도록 한 나의 결정은 믿음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나누는 것이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를 둠으로써, 나 자신을 그분의 뜻에 맡김으로써 나는 나의 병, 지금은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신문과 TV를 통해서 본 것은 용감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진정 사람들이 본 것은 하느님을 믿고 그의 믿음이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을 좌우하는 사람이었다. 고통과 아픔은 하느님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으며, 나의 마음은 가장 필요한 때에 버려지거나 홀로 남겨진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믿음의 사람으로 나는 고통과 아픔에 대해 오직 구속적, 구원적 가치에 대해서만 실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처럼 나 역시 하느님의 뜻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픔을 끌어안음으로써, 그것을 바라보고 넘어섬으로써 나는 가장 최악의 순간에서조차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었다.
내가 가르친 것을 실행하기 (Practicing What I Preach)
수술 전에 많은 사람들이 나의 생각을 듣고 싶어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사제로 사십 삼년, 주교로 이십 구년을 살았습니다. 그동안 항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을 맞닥뜨린 사람들과 상담도 했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이 내가 가르친 것을 실행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하느님께 수술과 그에 따르는 치료를 성실하게 괴로워하거나 불필요한 걱정없이 해 낼 수 있는 은혜를 청했었다.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은 어려운 상황, 특히 나에 대한 허위고발과 그 뒤에는 암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분의 특별한 선물은 바로 평화의 선물이었다.
이에 따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특별한 선물은 하느님의 평화를 나누고, 병과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나의 내적인 평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이 단순한 말보다 기도와 믿음에 더 많은 것이 있음을 볼 수 있기를 바래왔다. 진실로 하느님께서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조차 우리가 충만한 삶을 살도록 돕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명확히 해 낼 수 있는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있게 하는데 달려있다.
다른 이야기: 기도의 중요성 (An Aside: The Importance of Prayer)
나는 오래 전에 기도를 하기 위한 최고의 시간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솔직히 나는 일찍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데다가 보통은 가능한 한 더 오래 침대에 머물려고 했었다.) 전화와 초인종이 울리기 전, 우편물이 도착하기 전 이른 아침은 내게 주님과의 양질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처럼 보였다. 그래서 하느님과 내게 매일 아침 첫 한 시간을 기도를 위해 쓰기로 약속했다. 비록 내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몰랐지만 나는 지난 이 십년동안 이것을 지켜왔다고 기쁘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기도를 완벽하게 할 수 있음을 배웠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또한 내가 다른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나 일찍이 나는 다짐했다. “주님, 저는 아침기도 시간에 졸거나 문제해결을 위해 고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끊어버릴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시간을 주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나와 당신이 기도를 통한 당연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누구도 그 시간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하루의 첫 시간의 효과는 그 시간이 끝나더라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간은 확실히 하루의 시작에 주님과 나를 엮어주면서 동시에 하루 온 종일 나를 그분과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빈번히 내가 직면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문제가 있을 때 나는 주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며 그분의 도움을 청한다. 그래서 내게는 적어도 중요한 두 가지가 뚜렷해졌다. 즉 비록 옳게 사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되며 단지 계속해서 연결을 시도해야만 한다. 두 번째는 만약 당신이 시간을 바친다면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삶이 주님과 일치되어 갈 것인데 이것은 중요하다.
나는 아침기도 시간에 무엇을 할까? 먼저 성무일도서를 바친다. 내게 이는 매우 중요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의 기도로서 다른 사람들, 특히 온 세상에서 성무일도를 노래하고 기도하는 성직자와 수도자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느낌만이 아니라 내가 거대한 어떤 것의 한 부분임을 확신하게 해 준다. 두 번째로 중요한 이유는 다양한 시간에 바치는 시편들 때문이다. 나는 특별히 시편을 아끼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삶의 기쁨과 슬픔, 의로움, 그리고 죄에 대해서 직접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연결시켜준다. 시편은 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시편에서 당신이 주님과의 일치에 있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심지어 수 천년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통해 당신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이것은 성모 마리아뿐만 아니라 주님의 삶과 사목의 가장 결정적 순간의 생생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는 커다란 도움이다. 어떤 이는 묵주기도가 반복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묵주기도는 당신을 주님의 신비들, 즉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에로 향하게 만든다.
그 뒤 나는 마음의 기도, 곧 묵상으로 시간을 보낸다. 성경과 다른 영적인 서적을 기도하듯이 묵상함으로써 그 시간을 풍성하게 하려고 애쓴다. 내가 말한것처럼 수술 직후에 회복기간에 나는 약간 주춤했었는데 왜냐하면 기도할 마음이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친구들에게 “건강할 때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아플 때는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한 때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것을 나는 몇 몇 동료 암환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때로 그들은 예전처럼 깊이 있게 기도하지 못할 때 그들의 믿음이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 말만 강조하고 싶다: 연결됨. 기도없이 당신은 주님께 연결될 수도 일치할 수도 없다. 이것이 가장 핵심이다.
먼저 사제로, 그 다음에 환자로 (A Priest First, And A Patient Second)
1995년 유월 십 구일 병원을 떠나기 전에 나는 방사선 치료사인 앤 맥콜 의사(Dr. Anne R. McCall)와 나의 암 담당이자 친구인 앨렌 게이노어 의사(Dr. Ellen Gaynor)를 소개받았다.
그들은 일단 수술 후 치료가 칠월 십일에 시작되면 육 주동안 주말을 제외하곤 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기간 동안 또한 방사선 치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두 주마다 화학치료 주사를 맞아야 했다. 의사들은 내게 피로, 소화불량과 같은 부작용을 겪을 수는 있으나 머리가 빠지는 것과 같은 눈에 띄는 부작용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난 더 이상 잃어버릴 머리카락이 많지 않다고 농담을 하자 그들은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치료 과정은 단지 십분이면 되었지만 나의 병원 방문은 다섯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 어느날 의사가 내게 말했다. “추기경님, 만일 원하시면 뒷문으로 들어오셨다가 조용히 가실 수도 있으십니다.” 잠시 침묵한 뒤에 나는 말했다. “나는 사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환자입니다.”
이 같은 나의 방문들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최근 몇 달동안 나의 강론과 강좌에서 많이 이야기 되었기에 여기에서 소개하고 싶다.
방사선 치료 가운데 나는 나와 같은 치료를 받고 있는 로티(Lottie)라는 이름의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심각한 상태였고, 나는 그녀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팔월 초에 우리는 같은 시각에 치료를 마쳤다. 그 한달동안 나와 그녀는 연락을 주고 받았고, 나는 그녀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침내 노동절(Labor Day) 전날에 그녀의 딸인 크리스(Chris)가 전화를 해서, “추기경님, 어머니가 급속도록 나빠지고 있어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난 즉시 그녀의 딸, 그리고 남편과 함께 있는 로티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크리스가 말했다. “어머니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데 의식은 반쯤만 있습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알아볼 수 있을지 몰랐지만 그녀에게 가서 이야기를 한 뒤 병자성사를 주었다. 내가 방을 나오자 크리스가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문제는 저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로티, 당신은 떠날 수 없소. 난 당신이 필요하단 말이오. 죽어선 안돼’하고 계속해서 말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제 아버지와 이야기 하실 수 있나요?”
나는 로티의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제 그의 부인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밤 크리스가 전화를 해서 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가 침실에 들어가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로티, 이제 떠나도 된다오.” 크리스는 말하길,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곧 안정을 되찾으셨고 이틀 뒤에 평화롭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계속되는 도전들 (Further Challenges)
치료가 시작된 후에 나중에 커다란 문제를 안겨 줄 복합병이 생겼다. 벨로 신부와 길을 걷다가 내가 말했다. “켄, 나의 다리의 느낌이 이상한데.” “어떤 느낌인데요?” 그가 물었다. “말하자면 열이 있을 때 팔이나 다리가 당신께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을 때가 있지 않나? 내 다리가 지금 그런 느낌이라네. 분명히 방사선 치료나 화학 치료 때문이겠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서 로욜라 병원의 의사에게 물었다. “내 다리의 문제들이 방사선이나 화학치료 때문인가요?” 의사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리와 관련한 문제는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다리는 계속해서 나빠져갔다.
1995년 십 일월에 다리가 약해진 결과로 시작된 넘어짐의 첫 번째가 일어났다. 나는 먼덜라인의 빌라(the Villa in Mundelein)에서 넘어져 등골뼈가 부러졌다. 뒤이어 일월에 집 계단에서 넘어졌다. 다음의 육 개월에서 팔 개월동안 네 개의 등골뼈와 갈비뼈 네 개가 부러졌고 이것은 엄청한 고통을 가져왔다. 곧 의사들은 척추 협착증 외에도 나의 척추가 굽었고 골다공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 키가 약 9 센티미터나 작아졌다! 결과적으로 나의 추기경복을 줄어야 했다.
나의 등과 다리에 계속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1995년 늦여름동안 나는 암치료를 잘 해 내고 있었고 정신상태는 아주 좋았다.
그 당시 있었던 특별한 기억들 가운데 하나는 시카고 대교구에서 네 주동안, 그리고 졸리엣 교구(the Diocese of Joliet) 스무번 혹은 삼십번 이어진 “탭(Tap)의 신학(Theology on Tap)”의 대단원을 막을 장식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십 사년이 되었는데 매년 수 천명의 젊은이들이 와서 연설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 신앙의 다양한 면모를 찾아나섰다. 네 주의 마지막에 모든 이가 나의 집 정원에 모여 음식, 음료, 음악 그리고 즐거움을 나누었다. 비록 항상 이같은 즐거움을 나누기를 바랬지만 그 해에도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해냈다! 그리고 모든 이가 지극한 사랑과 격려의 인사를 내게 했기에 나는 미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나는 추기경님이 보이시는 것처럼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보통 솔직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왔지만 그러나 그날은 정말 계속해서 기분이 좋았다.
팔월 중순에 방사선과 화학 치료가 끝나자 나는 다시 한달을 더 쉬었다.
그 뒤 구월 중순부터 매주 췌장암을 퇴치하는데 쓰였던 5FU—(5-fluorouracil)라는 화학품을 사용하는 화학치료 주사를 맞으며 “관리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집에서 맞았던 주사약의 뒤이은 영향은 견딜만 했다. 주사는 이 년동안 계속될 예정이었다.
“희망의 표시”: 건강보험에 대한 나의 사목적 편지 (“A Sign of Hope”: My Pastoral Letter on Healthcare)
나 자신의 암과 대면하고 다른 암 환자들과 지내면서 누구나 사용 가능한 양질의 건강보험이 필요하다는 나의 인식이 깊어졌다. 1995년 유월 십 구일에 로욜라 대학병원을 떠나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환자가 건강을 돌보는 이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나의 의사들에게 바쳤다. 내게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그들이 모든 환자를 똑같은 존중과 애정으로 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잘 치료받기를 원했는데 곧 모든 이가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부색, 인종, 성별, 그리고 사회경제적 위치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제공하고 있는 훌륭한 치료에 대해서 뿌듯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의사와 치료사들에게 말했다.
1995년 시월에 나는 “희망의 표시”라는 건강보험에 대한 사목적 편지를 발표했다. 수술 후 사 개월이 지난 뒤였지만 건강보험은 나의 마음에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사목적 편지를 개인적인 편지로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함께 나누고 싶다.
주교로서 나의 모든 사목활동에 있어서, 특별히 지난 이 년동안 나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가톨릭 건강보험과 관련해서 투자하였다. 지난 해 건강보험 개혁이 공공정책 토론의 부분이 되었을 때 나는 몇 번에 걸쳐 그 토론에 기여를 했는데 예를 들어 가톨릭 건강보험 단체의 비영리적 상태의 중요성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과거로부터 현재에까지 가톨릭 건강보험에 봉사하면서 사목활동을 펼치는 수도자들과 그들과 함께 헌신해서 일하는 평신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현했다.
시카고 대교구에 있는 건강보험 사목활동에 대해서 몇 가지 염려와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나는 몇 달전에 가톨릭 건강보험에 대한 사목적 편지를 쓰기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일리노이의 메이우드에 있는 로욜라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짧은 회복 뒤에 나는 육 주에 걸쳐 방사선과 화학치료를 받았다.
이제 나는 가톨릭 건강보험에 관심과 뜻이 있는 주교로서만이 아니라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능력과 사랑 가득한 치료로 큰 도움을 받은 암 환자로서 다시 사목적 편지를 쓰려는 계획으로 돌아왔다.
지난 유월 로욜라 대학병원에 들어갔을 때 실은 건강한 소년이 위험한 악성 암을 지닌 것처럼 나의 삶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소식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암 판정, 수술, 방사선과 화학 치료로 이어졌던 시간은 한 평생 계속되는 나의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을 깨닫게 만들었다.
나는 심각한 병이 한 사람의 삶에 가져온 혼돈을 가장 개인적인 차원에서 경험했다. 오직 주님께 대한 신앙만이 가져 올 수 있는 치유를 찾기 위해서 나는 내게 안전과 만족을 가져오는 많은 것들을 놓아보내야만 했다.
처음에는 홍수물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위협을 느꼈었다.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죽음의 얼굴을 진정으로 보아야만 했다. 짧은 순간에 나의 모든 개인적 꿈과 미래를 향한 사목 계획은 멈추어서야만 했다. 개인적 삶과 사목활동의 모든 것이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만 했다. 나의 첫 경험은 불안함, 소외 그리고 더 이상 “집”에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암 소식으로 불구가 되기보다 수술과 치료에 나를 준비했다. 가족과 친구들과는 나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전에는 한번도 기도하지 않은 것처럼 다가오는 어떤 것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교회를 위해서, 특히 시카고 대교구를 위해서 인내할 수 있는 어떤 고통도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복되게도 마음과 가슴, 그리고 영혼에 평화, 예전에는 한번도 알지 못했던 평화가 나의 온 존재를 조용히 가득채웠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예전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아픔의 여정을 통해 함께 걷고 계신다는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믿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기간 동안 밤은 특별히 길고 수많은 두려움이 나타나는 시간이었다. 때로 예전에는 좀처럼 없었던 눈물도 흘렸다. 그러자 우리 나날의 삶이 얼마나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는 것에 의해 소모되어 가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런 어둠의 순간에 나의 믿음과 주님께 대한 신뢰 이외에 대교구와 온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나는 계속해서 힘을 얻었다. 나는 매우 친근한 방법으로 “희망의 공동체”인 교회의 삶을 넘쳐나는 사랑과 지지의 은총으로 경험했다.
나는 또한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고통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특별한 일치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방사선과 화학 치료를 위해 같은 방에서 기다리는 다른 암 환자들과 이야기하고 기도했다. 자주 암과 같은 심각한 병으로 고통받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서 나의 기도와 조언을 청하는 수많은 사람들과도 만났다.
지난 사 개월간의 이같은 경험은 가톨릭 건강보험에 관한 나의 사목적 평가를 성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나의 병과 가톨릭 건강보험의 상태와 미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이 병 그 자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급변하는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 환경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 믿는다.
동료 암 환자들로부터의 편지 (Letters from Fellow Cancer Patients)
병든 사람들이나 아파하는 친구나 친지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그들의 이름을 나의 기도목록에 포함시킨다. 처음에는 기도목록이 짧아서 평일미사에서 모든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점차 늘어나자 나는 더 이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목록의 이름이 칠 백개가 넘는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은 암이나 다른 중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할 때 기도 목록을 내 손에 꼭 쥔다.
내가 받은 많은 편지들이 특별히 가슴에 남아있다. 이것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이상으로 나의 사목활동에 대해서 말한다. 그 가운데 일부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다.
1996년 칠월 삼십 일일
친애하는 버나딘 추기경님,
안녕하세요. 저는 아일린 콤프라(Irene Compra)입니다. 저는 여덟 살인데, 성 마태오 학교(St. Matthew’s School)에 다니고 있고, 곧 삼학년이 된답니다.
부디 암으로 고통받는 제 고모와 삼촌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일린
1996년 팔월 육일
공경하는 버나딘 추기경님,
제 할머니 매리온 스펜서(Marion Spencer)께서는 작년의 어느 점심 때 추기경님 옆에 앉는 기쁨을 누렸답니다. 할머니께서는 추기경님과 나눈 대화를 이야기하시며 몇 주동안 태양처럼 빛이 나셨습니다. 그녀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녀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우리가 연례 가족 소풍을 위해서 떠날 때 할머니께서 뇌출혈을 일으키셨습니다. 지금 할머니는 팔로스 힐에 있는 팔로스 지역 병원(Palos Community Hospital, in Palos Hills)에 계십니다. 만약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할머니를 방문해 주신다면 추기경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나으리라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조 스펜서(Joe Spencer)
친애하는 버나딘 추기경님,
구 개월전에 저는 암으로 고통받는 제 일곱살 난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추기경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추기경님의 기도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제 아들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녀석은 대단히 밝고 활동적이랍니다.
악성 임파선들이 제거된지 벌써 일 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암의 흔적은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는 암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 가족은 추기경님을 위해서 매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저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테리 엘리스(Teri Ellis)
1996년 구월 십 삼일
추기경님,
아마도 추기경님께는 특별한 지향으로 기도를 청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시겠지요. 제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흔 네 살인 제 아내 앤(Ann)은 로욜라 병원에서 1995년 십 이월 팔일 대장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육 개월간의 기본적인 화학 치료를 마치고 상태가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네 살에서부터 열 여섯 살까지의 여섯 아이들의 엄마입니다. 그녀는 또한 열 살때 심각한 정신 충격으로 완전한 보살핌이 필요하게 된 열 세 살된 아들 마틴(Martin)의 가장 주요한 간호사이면서 돌보는 사람입니다. 저는 참으로 복되게 그녀와 십 삼년동안의 결혼 생활을 했는데 그녀는 모든 점에서 사랑과 정이 넘치는 아내이자 어머니입니다. 저는 추기경님께서 그녀와 마틴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는 지난 몇 년동안 추기경님의 개인적이면서도 사목적인 고난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지켜보았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넘치는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놀람과 존경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저로 하여금 추기경님을 통한 주님의 도우심을 찾게 하였습니다.
농부로서 저는 필요에 의해서 동시에 특별한 은총에 의해 계절에 관심을 둡니다. 버나딘 추기경님, 추기경님께서 추수하실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우리 삶의 시간이 무엇인지 보아라. 그것은 영원을 향한 순간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추기경님께 신앙에서 비롯된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존경을 담아,
제임스 헤르메스(James Hermes)
1996년 구월 십 팔일
존경하는 신부님,
저는 올 유월에 제가 전립선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려고 했을 때 수많은 검사와 의사들을 거치는 힘든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 몇 개월동안 아내와 제가 한 가지 치료방법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 다닐 때 두려움과 걱정은 제 안에서 자라났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말기암 판정을 받으셨다는 슬픈 소식이 있은 다음날 팔월 삼십 일일에 저희는 추기경님께서 성 바바라(St. Barbara)에서 집전하신 병자성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초기 췌장암 진단 이후에 첫 몇 달동안의 느낌을 말씀하셨을 때 저는 추기경님과의 특별한 가까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추기경님께서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계신 평화에 대해서 참으로 아름답게 말씀하셨을 때 깊이 감동을 받아 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난 정말 버나딘 추기경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시기를 원해.”
어떻게 저는 중앙 통로로 가서 짧은 줄에 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곧 한 사제에게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줄에서 계속 나아가는 대신에 저는 추기경님께서 다른 이를 위해 안수를 마치실 때 추기경님 옆에 섰습니다. 그러자 추기경님께서는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셨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처럼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신부님,” 저는 말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전립선 암 진단을 받았고 오늘 추기경님께 안수를 받고자 왔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잠시 침묵하시더니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저는 어릴적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졌고 다시 교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께서 성유로 제 손바닥을 문지르시고 제 손을 다정스럽게 잡으시며 “전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을 때 커다란 내적 평화가 저를 감쌌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해서 두렵습니다. 내일 아내와 저는 스캇데일에 있는 마요 병원(the Mayo Clinic in Scottdale)으로 가서 그곳에서 전립선에 방사선으로 “씨(seeds)”를 심는 논란이 되고 있는 치료를 위해 검사를 받을 것입니다. 제가 이 길을 걸을 때, 추기경님께서는 계속해서 제게 큰 영감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추기경님께서 대단한 존엄함으로 암과 마주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추기경님의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사랑과 겸손, 그리고 은총을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신 당신 삶의 가장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고 계실 때 저 또한 추기경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추기경님의 여정에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잭 맥과이어(Jack McGuire)
1996년 구월 이십일
친애하는 버나딘 추기경님,
제가 당신께 연락을 드리는 것이 아마 당돌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어떻게 추기경님께서 저희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올 오월 초에 오십 일곱살 된 제 남편은 오진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의 통증은 삼십 육년간 일주일에 육십에서 팔십 시간 트럭을 운전하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췌장과 담관의 암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랙스(Rex)는 정말 놀랐었고 겁을 먹었는데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소 놀란 상태에서 저는 지속적인 성체조배실로 가서 추기경님의 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리구오리안(the Liguorian)의 글을 읽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제 동생 팻(Pat)에게 그 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는 신시내티 대교구에서부터 추기경님을 수술한 의사의 비서에게까지 몇 통의 전화를 했습니다. 추기경님의 의사는 그날 밤에 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희는 정말 놀랐는데 그는 신시내티에 있는 종합 병원(University Hospital in Cincinnati)의 조셉 피셔 의사(Dr. Josef E. Fischer)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불가능한 약속을 한 놀라움과 도대체 저희가 누구이길래 하는 의구심을 가진 뒤에 피셔 의사는 랙스를 위한 중대 수술을 위해 그의 일정을 조정했습니다.
저희가 추기경님께 알려드리고 싶은 것은 화학치료와 응급실 방문 등의 병원에서 모든 시간동안 랙스에게 한 말은 이것입니다. “기억해 랙스, 너는 조(Joe)를 알고 있어.” 잡지의 글을 통해서 추기경님의 친구들이 추기경님을 조라고 부르는 것을 알았고, 저희는 추기경님을 뵌 적은 없지만 저희들의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랙스의 앞으로의 예상은 좋지 않은데다가 그는 허약합니다. 그는 체중이 많이 줄었고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저희는 다만 한 번에 하루씩만 견디어 냅니다. 의사들은 그의 수치가 올라갔다고 하지만 삼십 육년을 버틴 남편은 그들이 수치를 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부디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친구 조”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성 페레그린(St. Peregrine)과 모든 성인의 성 미카엘(St. Michael of the Saints)에게 날마다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추기경님을 기억합니다.
사랑과 존경을 담아,
랙스와 에밀리 위크스(Rex and Emily Weeks)
Part Four: 죽음과 친구되기 (Befriending Death)
묵상(Meditation): “걱정과 삶의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 오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find life burdensome”)
1996년 팔월 삼십 일일 암이 폐로 전이되었고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발표한 다음 날 나는 일리노이에 있는 브룩필드의 성 바바라 성당(St. Barbara Church in Brookfield, Illinois)에서 합동병자성사를 주례하였다. 나는 아픈 동료 환자들에게 우리가 중병에 있을 때 혹은 어떤 중대한 어려움에서도 개인적으로 내게 평화를 가져다 준 몇 가지 것들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 첫째는 완전히 주님의 손에 우리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품에 안으시며, 결코 내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특히 가장 어려운 순간에 이 믿음이 삶의 고통과 혼돈 속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같은 주님이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이것은 내가 아끼는 성서구절로 아마 당신의 것이기도 할 것이다. 너무나 편안히 위로해 주시는 말씀이기에 실재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게 들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좀더 깊이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처음에 보이거나 들리는 것보다 좀더 복잡하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과 우리가 메도록 초대하시는 “멍에” 사이에 긴장이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는 무엇인가? 고대 랏비들은 모세의 법을 멍에에 비유하곤 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다르다. 왜냐하면 “멍에” 혹은 지혜, 법의 중심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분이 가르치신 것을 실천했다. 그분은 그가 섬겼던 사람들에게 온유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겸손히 순명했다. 그분은 서로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고, 그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바쳤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은 자신의 목숨조차 내어주시는 그분의 태도, 그분의 가치, 그분의 사명, 그분의 사목, 그분의 의지를 우리가 겪게 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날마다 받아들이고 사는 것에서 비롯된다.
무엇이 예수님의 멍에를 “편하게” 만들까? 좋은 멍에는 마찰을 가장 작게 줄이도록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짐을 더 쉽게 지고 가게 하시며 우리 어깨에 그의 멍에가 가볍고 부드러울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짐이 “가볍다”하고 말씀하신 뜻이다. 실은 이것은 상당히 무거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왜일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보통 멍에 하나는 두 마리의 황소에 씌워져 그들을 한 팀으로 만든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내 옆을 걸으며 어떻게 내가 짐을 지고 가는지를 보고 배워라. 만약 네가 나로 하여금 너를 돕게 한다면 무거운 일이 더 쉽게 보일 것이다”하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아마도 가장 궁극적인 짐은 죽음 그 자체일 것이다. 이것은 종종 아픔과 고통, 때로는 극도의 어려움에 따라온다. 나의 경우에는 주로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심각한 피로로 밤낮으로 나를 누워있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없애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분은 우리가 그것을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자신과 그것을 이루는 모든 것을 놓아보내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도록 허락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적이나 위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친구의 방문 (A Visit from an Old Friend)
지난 해 칠월 상당히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십 오년도 더 된 나의 친구인 헨리 나웬 신부(Fr. Henri Nouwen)가 나를 방문한 것이다. 그는 시카고 지역의 회의에 왔다가 나를 보러 올 수 있는지 물었다. “물론이지,” 나는 말했다. 우리는 한 시간여를 함께 보냈는데 그는 그의 가장 최근 책인 “가장 위대한 선물: 죽음과 보살핌에 대한 성찰” (Our Greatest Gift: A Reflection on Dying and Caring)을 내게 가져왔다. 우리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다. 비록 나의 신앙으로 그러한 시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러한 인식은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방사선 치료로 상당히 지쳐 있었다. “매우 간단합니다” 그가 말했다. “만약 추기경님이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있다가 친구에게 이야기하면 그러한 두려움과 걱정은 줄어들고 심지어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적으로 보게 되면 추기경님은 부정하려는 상태에 들어가서 가능한 한 멀리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 할 것입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죽음이 현세의 삶에서 영원한 삶에로의 이전이라고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친구로 보아야만 합니다.”
이 대화는 내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어느 정도 없애 주었다. 올해 구월 이십 일일 나웬 신부님이 오십 구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온 삶을 바쳐 다른 이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를 가르쳤왔기 때문이다.
암이 다시 돌아오다 (The Cancer Returns)
나의 침상 머리맡에는 지난 이십 사년동안 아름답게 조각된 상아(ivory) 십자가가 나무판에 걸려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적으로 상기시켜 왔다. 그러나 아침에 깰 때 나는 보통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침상 머리맡에 걸려있기 때문에 쳐다볼려면 필요 이상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비록 언제나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그림자는 각각의 우리 삶에 드리워져 있다. 이것이 지난 해 늦 팔월까지 내게 있었던 일이다. 그 뒤 십자가는 나의 길동무가 되었고, 나를 고향인 하느님께로 인도해 줄 새로운 친구와의 만남, 곧 죽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 되었다.
1996년 팔월부터 나의 등과 다리의 계속되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빡빡한 일정을 유지했다. 친구들이 내가 그렇게 활동적어야 하는지 물을 때 나의 등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걸을 때에도 아프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통증은 시카고나 워싱톤, 혹은 로마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가끔 주교는 좋은 머리와 가슴을 가져야 하지만 좋은 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농담을 했다. 팔월 오일 시카고 대교구는 내가 암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구월 중순에 예정된 척추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의사는 내게 가장 좋은 수술 준비는 평소 일정을 지키면서 가능한 한 휴식을 많이 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수술을 통해 아홉 달도 넘게 내가 경험한 통증이 완전히가 아니라면 적어도 거의 확실하게 제거될 것이라고 말했다.
팔월 첫 주간에 나는 팔월 십 이일에 있을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이것은 이 년도 넘게 애써 준비해 온 가톨릭 공동 프로젝트(Catholic Common Ground Project)의 설립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나는 프로젝트의 설립자로서 새 천년기에 들어서는 미국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 창조적이면서도 충실하게 가톨릭 신자들에게 핵심적인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포럼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우리가 불신과 양극화, 그리고 적극적인 대응을 방해하는 완고한 자세를 넘어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 같은 프로젝트 설립의 발표에 대해서 즉각적이고 매우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쏟아지는 편지들이 나와 프로젝트에 일할 사람을 공급하는 뉴욕에 있는 내셔널 패스토럴 라이프 센터(National Pastoral Life Center in New York)에 보내졌다. 사제들과 신자들은 함께 지원과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확실히 어떤 이들은 프로젝트를 싸움에 임하는 전장으로 보았고, 반면에 다른 이들은 교회 가르침에 따른 문제들에 있어서 타협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했다. 나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의 응답을 준비하면서 가톨릭 공동 프로젝트가 정통 교회 가르침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일정 부분에 있어서 확신을 주려고 했다.
팔월 이십 칠일 화요일 나는 대교구의 보좌관들과 만나 그 전 주에 종합 피검사를 했다고 나의 월별 리포트에서 말했다. 검사결과 더 이상의 암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로욜라 병원에 가서 자기공명검사(Magnetic Resonance Imaging)를 받아서 구월 십 육일에 척추 수술을 하기 위한 마지막 검사를 하러 간다고 말했다.
또한 일리노의 나일즈에 있는 성 요한 브레보프 성당(St. John Brebeuf Church in Niles, Illinois)에서 내가 주례한 합동병자성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것은 암 환자들과 다른 중병 환자들을 위한 나의 사목활동의 일환으로 내 스케줄에 있는 같은 류의 병자성사 가운데 첫 번째 것이었다. 보좌관들과 나는 가까운 미래에 성 아가타 성당에서 네 번째 합동병자성사를 치를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나는 병자와 노약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안수와 병자성유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아올 때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들에게 이야기 했다. 나 역시 암 환자로서 성유를 받았다. 수많은 지역교회의 신자들과 무리를 이루어 병사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한편 나는 초기 진단과 췌장암 수술 이후 십 오개월동안 암에서 자유로웠다. 그때 나는 의사들이 내게 직접 말한대로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앞으로 오년동안 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일반 검사들의 결과는 계속해서 음성이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에 했던 피검사 결과 역시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래서 팔월 이십 팔일 수요일에 로욜라 병원으로 MRI 검사를 확인하러 갈 때 나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MRI 후에 나의 훌륭한 암 전문의 게이노어 박사의 심각한 얼굴은 즉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내게 말했다.
“우리 이야기를 좀 해야 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전에 그녀는 “추기경님, 모든 것이 좋습니다”하고 늘 말했었다. 잠시 뒤에 그녀는 나의 간에 다섯 개의 암 종양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직경이 거의 삼 센티미터나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비록 게이노어 의사가 아직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계속해서 말했지만 나는 열정에 넘친 희망을 억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진정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난 희망의 몇 달동안 내가 돌아온 암이 가진 죽음의 씨를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게이노어 의사는 내게 아직 일년정도 살 날이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곧 게쎄마니 동산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의 내가 떠올랐다. 그 순간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 고통과 죽음의 그 전날 밤 예수님이 느끼셨던 지독한 외로움을 나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아주 단순하게, 나는 주님께 뿌리를 두고 있었고, 내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로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불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나는 사십년도 넘게 내 삶과 사목활동을 몸 바친 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교회의 주교들, 사제들, 부제들, 그리고 신자들로부터의 받은 사랑 가득한 격려로 기분이 괜찮았다. 요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 곧 나의 것이 되었다: “나는 너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요한 14:18).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들의 사목자가 될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게이노어 의사가 말한 것의 중대함을 이해하는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다음 날 아침 나의 고위 사목팀—레이몬드 고더트 주교, 피터 바우만 신부(Fr. Peter Bowman), 메리 브라이언 코스텔로 수녀, 데니스 둔 수사(Br. Dennis Dunne) –을 만나 암이 돌아왔다는 것과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보통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가 좀 더 희망적인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척추 수술이 취소되었다는 것도 설명했다. 더욱이 만약 수술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게이노어 의사가 추천한 다른 화학치료를 지연시킬 뿐이었다. 그 뒤 나는 사목센터의 사무실로 가서 몇 몇 편지에 서명을 하고, 가까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있을 기자회견 준비를 시작했다.
공개적인 죽음 (Dying Publicly)
팔월 삼 십일 금요일에 나는 기자회견을 했다. 회견장은 기자들과 TV 카메라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다. 나는 가장 최근 진단과 나의 생명이 일년도 안 남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양질의 시간이 내게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의 기도는 얼마가 되든 내게 남아있는 시간을 긍정적인 방법, 곧 제가 봉사하도록 불리운 사제들과 사람들, 그리고 나의 영적인 행복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할 것입니다.”
덧붙여 나는 지난 해 내내 나와 같이 전적으로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긴 암 환자들을 상담해왔다고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언제나 그 일을 하기 위해 애썼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 더욱 큰 확신과 신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내가 어려운 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심으로 나는 평화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 삶의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로 여깁니다.”
나는 또한 기자들, 나의 친구들, 그리고 함께 한 보좌관들에게 내가 나웬 신부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다. 즉 죽음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가능한 한 나의 모든 일정을 지키면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시카고 대교구를 위해 계속해서 일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대교구의 사제들과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내가 이해와 사랑, 그리고 충실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여러분과 더 큰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연대와 서로를 위한 격려,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시카고 대주교로서의 나의 재임기간, 특히 지난 삼년동안 나는 특별히 방송매체와 많은 접촉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시카고 대교구장으로 있은 오랫동안 우리는 긍정적이면서도 전문가다운 관계를 누렸으며,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이 나와 함께 하기를 개인적으로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종교가 무엇이던간에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나 역시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나의 발표에 따른 질문 시간에 어떤 기자가 내게 남은 시간 중에 특별히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솔직히 나의 병이 말기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나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이 많지 않았었다. 나의 첫 응답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예전에 했던 것처럼 매일 일하는 것이다하고 대답했다. 사목활동에 있어서 특별히 내가 아직도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느끼지는 않았었지만 잠시 뒤에 나는 북부 이태리에 있는 친척들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의 대답을 통해 내 마음속에 감추어 두있던 것이 드러났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그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시카고 대교구의 사람들과 선의의 사람 누구에게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도 어떻게 내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하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다가오는 몇 주간동안 나의 삶에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은 죽음과 이같은 놀라운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내가 준비하는 일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나의 사목은 계속되다 (My Ministry Continues)
앞의 묵상에서 말한 것처럼, 그 다음날 나는 브룩필드에 있는 성 바바라 성당에서의 두 번째 합동병자성사를 위해서 방문했다. 모든 것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다시 병자성사를 받으며 이번에는 내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게 이것은 깊은 영적 체험이었다.
내게 양질의 시간이 아직 좀 남아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는 한 사목활동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여느 때와 같이 구 월달은 많은 일정이 있었다. 어떤 때는 같은 날 두 개의 모임에서 이야기를 했다. 또한 암 환자들을 위한 사목도 계속했는데 매일 저녁 열 통 이상의 전화를 걸고 동료 암 환자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구월 구일 말기암이라는 사실을 밝힌지 단지 열흘 뒤에 나는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President Bill Clinton)으로부터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나는 국가로부터 시민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예를 겸허히 받았다. 나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백악관은 내가 죠지타운 대학(Georgetown University)에서 강연을 할 때 다른 여덟 명의 수상자들과 함께 워싱턴을 방문하여 수상식에 참여하도록 감사하게도 일정을 조정하였다. 행사는 많은 도보를 하게 만들었기에 난 지팡이를 들고 간 것이 기뻤다. 나는 백악관 잔디밭에서 많은 인터뷰를 했다. 죠지타운에서의 나의 강연은 성공적이었고 비록 이 나라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종종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관된 생명윤리의 필요성과 우리 사회 안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모든 것이 빡빡한 일정으로 힘든 하루였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하루이기도 했다.
구월 이십일 나는 보스톤 대교구의 가톨릭 건강보험 시스템(the Catholic Healthcare System of Archdiocese of Boston)에서 주는 카리타스 크리스티 메달(the Caritas Christi Medal)을 받기 위해 보스톤으로 갔다. 가톨릭 건강보험을 위해서 일했던 것이 이렇게 인정받는 것이 기뻤지만 여행기간동안 나는 많이 아팠다. 새로 받게 된 화학치료는 이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더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더욱이 췌장암과 관련된 피로는 갈수록 심해졌다.
교황님과의 만남 (Meeting with the Holy Father)
구월 이십 삼일 나는 나의 건강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개인적으로 보고하러 로마로 향했다. 켄이 나와 함께 동행했고 방송매체에는 그러지 않도록 부탁했다. 실은 너무 많은 인터뷰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교황님 방문은 내가 기대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므로 개인적이고 비공식적이었다. 우리는 빌라 스트리티크(Villa Stritch)에서 단순한 “사진촬영”만 준비했고 인터뷰는 없었다. 날씨는 좋았고 나는 좀 여유있게 쉴 수 있었다. 우리는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교황님을 알현할지 몰랐다.
교황님과 나는 구월 이십 칠일 금요일에 로마 근처의 교황님의 여름 숙소인 알반 힐(Alban Hills)의 카스텔곤돌포(Castelgondolfo)에서 만났다. 우리가 만남을 끝낼 즈음에 벨로 몬시뇰이 잠시 우리와 함께 했다.
우리에게는 이태리에서 하루의 시간이 더 있었으므로 켄과 나는 구월 이십 팔일 토요일에 아시시(Assisi)로 여행을 했다. 우리는 시카고 대교구의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했고, 몇 몇 프란치스칸 형제들과 즐거운 점심식사를 했다. 미사 가운데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없었기에 나는 봉헌 전에 신자들의 기도를 바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켄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었다.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제들의 다양한 종류에 대해서 적었던 것이다: 몸이 약한 사제들, 은퇴한 사제들, 술중독인 사제들, 젊고 활기찬 사제들, 우울한 사제들, 소외된 사제들, 재능있는 사제들,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다른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사제들, 본당 사제들, 특수사목에 종사하는 사제들,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위해 일하는 사제들, 정신이 없는 사제들, 사제들을 사목하는 사제들, 갓 서품된 사제들, 학생인 사제들, 잠시 쉬고 있는 사제들, 문제가 있는 사제들, 행복한 사제들 그리고 만족한 사제들. 그의 암송이 끝날 무렵 나는 웃으면서 나 자신도 몇몇 종류에 속한 것을 알았다! 아시시를 방문한 것은 내가 말기암이라는 사실을 안 뒤 몇 달동안 있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래를 놓아보냄 (Letting go of the Future)
켄과 내가 시카고로 돌아왔을 때 나는 사목일정을 다시 시작했지만 갈수록 그것은 힘들어져 갔다. 오직 내 삶의 모든 것을 제대로 해 놓고자 하는 열망이 나를 움직이게 하였다. 나는 유언을 마무리하고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어 주며 가까운 보좌관들에게 나와 그들의 자료들을 대교구의 기록실과 문서고로 옮길 준비를 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나의 장례미사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결정한 뒤 나의 죽음 뒤에 나의 어머니를 계속해서 돌보는 것에 대해서도 준비를 마무리 하였다.
사제단과의 기도 (Praying with the Presbyterate)
시월 칠일 약 팔 백명의 시카고 대교구 사제들과 수도 사제들이 홀리 네임 주교좌 성당(Holy Name Cathedral)에서 나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아무도 드러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함께 모이는 마지막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날 밤에 나는 1982년 팔월 이십 사일 대주교 착좌식을 위해서 주교좌 성당에서 처음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또한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하는 그날 내가 한 강론의 결론을 다시 이야기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빵을 나누고 잔을 축복하면서 우리 삶과 사목이 함께 섞일 때 나는 오래 전부터 죽음으로 나의 이름이 성찬기도문에서 빠지더라도 여러분이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고 즐기고, 함께 단식하고 기도하고,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며, 함께 절망하고 희망하며, 함께 논쟁하고 화해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나를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친구로, 동료 사제로, 그리고 주교로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요셉, 여러분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을 강복하기 전 기도의 마지막에 모든 사제들은 그들의 손을 들어 나를 축복하였다. 어느 하나의 눈도 눈물이 고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 역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의 사목활동을 놓아보냄 (Letting go fo My Ministry)
시월 중순이 되자 의사가 말한 것처럼 암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빨리 전이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나는 나와 같은 화학치료를 받는 어떤 환자들의 종양이 성장을 멈추거나 크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약의 부작용과 이런 사정 때문에 나는 화학치료 받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종양이 자라나는 결과로 지속적인 피로, 매일 발생하는 열, 그리고 간을 둘러 싼 막을 누르고 있는 종양의 압력으로 인해 가슴통증이 뒤따랐다. 최근 방문 때 게이노어 의사는 내가 더 이상의 황달(jaundice)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종종 이것은 췌장암이 간까지 퍼졌다는 것을 뜻했다. 아마 어느 정도의 황달은 좋을 것이라고 나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괜찮은 것처럼 특히 TV에서 그렇게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내가 실제로 그렇게 아프지 않다고 추측했고, 나에 대한 많은 요청, 심지어는 요구들이 있었다. 가장 이해가 되는 것은 내가 어찌하여 그들의 요청, 심지어는 완고한 것들까지 들어줄 수 없는가 하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1997년 봄에 가톨릭 공동 프로젝트의 첫 모임을 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내가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지자 우리는 시월 이십 사일 목요일에 시카고에서 위원회 모임을 열기로 결정했다. 비록 우리는 하루동안 나의 참석을 계획했으나 나는 아침 모임과 저녁 강연으로 제한해야만 했다. 아침 모임에서 나는 모임의 지도자 역할을 나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오스카 립스콤 대주교(Archbishop Oscar Lipscomb)와 모바일 대주교(Archbishop Mobile)에게 넘겨주었다. 그날 밤 강연 때 나는 가톨릭 공동 프로젝트의 본질, 중요성, 그리고 미래에 초점을 두었다.
시월 이십 구일 화요일에 특별한 일로 로욜라 병원을 방문을 했는데 이때 새롭게 이름 지어진 버나딘 추기경 암 센터(Cardinal Bernardin Cancer Center)가 봉헌 되었다. 거의 수술 후 일년이 지난 오월 삼십 일일 나는 병원 기자회견에 참석하도록 초대받았는데 병원은 암 센터를 나를 기념하여 새롭게 이름을 짓는다고 발표했다. 암 센터는 원래 1994년에 문을 열었고 나와 같은 많은 사람을 도와 주었다. 센터를 새롭게 이름 지으면서 경영진은 암 연구와 치료 프로그램을 위해 이십만불 규모의 기부금을 위한 모금을 시작하였다.
나는 피로 때문에 지난 화요일 그들이 내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새 건물에서 그들이 내게 보여 준 훌륭하면서도 연민어린 능숙한 치료에 감사하면서 의료진에게 즉석에서 연설을 하였다. 나는 그들을 축복하였고 그들이 모두 손과 목소리를 높여 나를 축복할 때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암 센터 바깥의 텐트에서 특별한 저녁에 초대된 암 센터의 지지자들의 모임에도 짧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시속 팔십 마일의 격렬한 폭풍이 번개와 천둥을 동반해서 일었다. 저녁 식사는 연기되었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일찍 떠났다. 이것이 아마 시카고 대교구에서의 나의 마지막 공식적 모습이었다.
십자가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다 (The Cross comes into clear view)
다음 날 MRI 검사는 암 종양이 계속해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시월 삼십 일일 어제부터 나는 즉시 나의 공적인 일정을 과감하게 줄이기로 했다. 나는 또한 나날의 대교구의 임무를 나와 켄과 함께 살고 있는 총대리인 고더트 주교에게 맡겼다. 이것은 내게는 힘든 일임에도 대교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고 가장 관심있는 일이었다. 나는 예전에 칠대 시카고 대주교로서 착좌하는 전례에서 강론을 통해서 신앙 공동체와 TV를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의 모든 사목활동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어떤 이는 이 같은 부름을 말 그대로 살아서 피를 흘리는 순교자가 됩니다. 어떤 이는 그들이 봉사하도록 불리운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 에너지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내게 어떤 미래가 다가오더라도 오늘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신 착한 목자처럼 살 것을 다짐합니다.
강론은 단순하고 직접적이었으며 나는 내가 말한 것을 나의 온 존재로 뜻했다. 강론의 마지막 결론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만약 하느님께서 힘과 은총을 내게 베푸신다면, 나는 이곳 성당의 주교좌에서부터 시카고 교회를 자애로 오랫동안 이끌 것입니다…우리는 함께 인류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이정표인 삼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는 많이 받았기에 나 자신을 여러분에게 드릴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봉사와 지도력, 나의 에너지, 나의 재능, 나의 마음, 나의 심장, 나의 힘, 그리고 물론 나의 나약함까지 드릴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나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이제 명백해 진 것은 주님의 뜻은 여러분과 내가 삼천년기의 문턱을 함께 건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십 사년동안 나는 지역 교회와 미국 교회, 그리고 보편 교회에 나 자신을 바쳤다. 그리고 나의 삶을 시카고 지역 뿐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더 넓은 가족과도 나누었다. 오늘 내게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고통과 죽음, 그리고 평화 뿐만 아니라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나 자신을 기꺼이 바친다.
결론: 평화의 선물 (The Gift of Peace)
내가 이 책을 마칠려는 지금 나는 지친 동시에 기쁨 가득하다. 암이 온 몸에 퍼져서 생기는 피로 때문에 지치지만 내게 매우 중요한 책을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에 기쁨도 가득하다.
마지막 말을 적는 지금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평화 가운데 있다.
오늘은 십 일월의 첫날이고 가을은 겨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있다. 곧 나무들은 나뭇잎의 생기있는 색깔들을 잃을테고 눈이 땅을 덮을 것이다. 지구는 멈출 것이고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지에서 꽁꽁 동여맨채로 따뜻함을 향해 서둘러 갈 것이다. 시카고의 겨울은 혹독하다. 이것은 죽음의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봄이 새 생명과 놀라움을 지닌 채 곧 올 것을 안다.
내가 봄이 왔을 때 살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곧 다른 방식으로 새 삶을 경험할 것이다. 비록 나는 무엇이 죽음 뒤에 올지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이 땅에서 나의 삶을 통해서 가장 큰 능력으로 그분을 섬기도록 나를 부른 것처럼 그분께서 집으로 부르고 있음을 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천국과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청했다. 가끔 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는데 왜냐하면 나 역시 그들보다 더 이상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젊은이가 물은 것처럼 내가 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기대하고 있다면 나는 이 책에서 전에 말한 것과 연결을 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처음 나의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북부 이태리에 있는 부모님의 고향인 토나디코 디 프리미에로로 여행 했을 때 나는 예전에 그곳에 와 본 듯이 느꼈다. 어머니의 사진첩을 수 십년동안 본 뒤에 나는 산과 들, 집과 사람들을 알았다. 우리가 계곡에 이르자 “오 하느님, 나는 이곳을 압니다. 난 집에 있습니다”하고 말했었다. 어떤 면에서 지금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넘어가는 것은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집으로 갈 것이다.
내가 뒤에 남겨두고 싶은 것은 내가 발견한 것을 여러분도 찾기를 바라는 단순한 기도일 뿐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 곧 평화의 선물이다. 우리가 평화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힘든 순간에서조차 최선의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발견한다. 우리는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놓아보내고 본질적인 것은 받아 안는다. 우리는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온전히 활동하시도록 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손의 도구가 된다.
내가 자주 말한 것처럼 만약 우리가 주님과의 일치를 찾는다면 우리는 기도를 해야만 한다. 내가 가장 아끼는 기도 가운데 하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인데, 함께 이 기도를 바치면서 나의 글을 마칠까 한다: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이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출판자의 노트 (Publisher’s Note)
요셉 버나딘 추기경은 항상 그의 글맵시에 커다란 자부심을 지녔었다. 그는 좋은 펜과 종이를 사랑했으며, 그의 삶을 통해서 수많은 편지와 카드, 그리고 메모를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직접 써서 보냈다. 오늘날 수많은 그의 글이 요셉 버나딘을 친구이자 형제로 기억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집에서 액자에 넣어져 걸려있다.
버나딘 추기경이 “평화의 선물”을 마무리 할 때 그는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했다. 그는 이 책의 시작에 있는 편지와 서문, 각 장, 묵상, 그리고 결론의 제목들을 직접 손으로 쓰기로 했다.
추기경님은 1996년 십 일월 일일에 평화의 선물을 마무리했다. 그것은 췌장암으로 그가 돌아가기 전 단지 십 삼일 전이었다. 그의 마지막 손길은 책의 제목과 그의 이름을 서명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