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선물 (The Gift of Peace) 번역을 마치면서
바오로 수녀님과 나의 어머니를 기억하며
암이 내게 찾아왔다. 2007년 사월 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와 함께. 삼 십년 넘게 나는 암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내가 군대에서 복무하던 1994년 할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던가 외할아버지 역시 암과 관련이 있는 어떤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2007년 내게 암이 찾아온 이후에야 다시 깨닫게 된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암에 걸린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1999년 신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김은영 바오로 수녀님을 신학교에서 만났다. 그녀는 포교 성베네딕도회 청원기 수녀였고 나와는 대구신암본당 중학교 동기였다. 백 여명도 넘는 수도자와 신학생들 가운데 우연히 같은 식탁에 앉게 된 우리는 특별한 인연을 예감하면서 하느님을 찾는 길의 도반이 되었다.
2005년 종신서원을 한 바오로 수녀님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목처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미국 클리브랜드 교구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종종 신학교로 배달된 바오로 수녀님의 편지는 내게 항상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 뒤 2007년 사월 사제서품식을 준비하던 내게 바오로 수녀님의 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너무도 젊은 수녀가 이제 일을 시작했는데 암이라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부정도 하고 화도 내 보았지만 친구 수녀가 암으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바오로 수녀님과 나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사제서품 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항암치료 중의 수녀님은 무척 야위어 있었다. 대장암은 조용히 깊숙하게 가난한 영혼을 파괴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나에게 와서 쉬어라”하신 예수님 말씀이 절실했다.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암에 대해서 배워갔다. 암이 어떻게 발생하며 수술과 항암치료가 가져오는 증상들-피로, 구토, 복통, 신경마비 등-을 눈으로 보았다. 집요하게 세력을 확장하려는 암세포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인간의 싸움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링 위에서의 맨손 난투극이었다. 때론 우위를 차지하다가 때론 수세에 몰리면서 라운드가 계속될수록 복서의 기력은 약해져갔다. 손에 땀을 쥐고 응원을 하다가 복서가 그로기 상태에까지 몰리는 것을 보면 흰 수건을 링으로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복서가 다시 일어서는 한 “기권”은 우리 몫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응원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땅에서도 계속되었고 강도높은 항암치료 덕분에 바오로 수녀님에게도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 “잘 쉬는 것이 소임”이 된 친구는 시와 음악, 미술을 통해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고, 미국본당사목으로 지친 내게 활력소가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암은 더 지독하고 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두번째 항암치료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나는 요셉 버나딘 추기경을 떠올렸다. 그는 시카고 대교구장으로 십 사년간 사목하다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후 잠시 회복한다. 하지만 암이 다시 간으로 전이되었고, 치료를 포기한 뒤에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을 충만하게 살았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평화를 묵상하는 “평화의 선물 (The Gift of Peace)”을 남겼다. 나는 바오로 수녀님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싶었고, 이것이 내가 번역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번역은 잘못하면 반역’이라던 옛 교수신부님의 말처럼 번역은 더디고 힘들게 이루어졌다. 어휘선택, 의미전달, 문화적 차이 등 모든 것이 도전으로 다가왔고, 학업 또한 병행해야 했기에 2009년에 시작한 일은 2010년으로 접어들 때에도 절반도 마치지 못했다. 바오로 수녀님께는 전화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 외에 번역을 마친 첫번째 Part를 이메일로 보냈고 감동깊게 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2009년 십 일월부터 바오로 수녀님께서 더 이상의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영양제만으로 버티기 시작하면서 나의 마음은 급해졌다. 그 뒤 글을 읽을 기력조차 없게 된 친구 수녀님에게 “평화의 선물”은 읽을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것, 살아야 할 것이 되었다.
2010년 삼월 십 오일 바오로 수녀님께서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을 때 암은 나의 어머니에게 찾아왔다. 같은 대장암으로 어머니 역시 수술을 받으시고 곧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하셨다. 마치 암이 이제는 나와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방학을 맞아 급히 귀국한 나는 어머니의 오차 항암 때 함께 병원에 입원했다. 밤이면 뒤척이시는 어머니의 침대 옆에서 소리없이 온 몸을 떠돌다가 밤이면 자기를 잊지 말라고 고함치는 암을 보았다. 가장 나약한 시간에 보이지 않는 병과 싸우는 환자들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병원 침대 곁에서 나는 번역을 계속해 나갔다. 버나딘 추기경님의 암과 죽음에 대한 묵상은 어둠 속에서 나를 인도하는 빛이 되었다.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나에게도 평화를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선물이었다. 살아있는 모두를 위해, 특별히 암으로 고통받는 나의 어머니와 장 도르가 수녀님을 위해서 나는 바오로 수녀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여정에 함께 해 준 친구들-루멘 원장 수녀님과 라파엘 수녀님, 허 바오로, 백 라디슬라오, 소 아우구스티노, 주 요한, 김 안드레아 신부들과 백 아녜스-을 위해서도 평화의 선물은 절실했다.
바오로 수녀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많은 이가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했고 우리 곁에 있는 하느님 평화의 선물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암과 싸우는 이들과 함께 걸으며 평화의 선물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김 하상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