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엇입니까(What’s love)? 사랑은 인간을 전율케 하고 감동과 영감을 주어 문학, 음악, 예술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며 그 때문에 사람이 살게 되는 존재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딱히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향기로운 꽃보다 진하다고…’ 노래를 불러도.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시를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사랑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은 남녀간의 에로스입니다. 달콤하고 격정적인 육체적 성적 사랑인 에로스는 오랫동안 교회내에서 금기된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 2005년에 발표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회칙에서 에로스를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육체를 배제하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없듯이 인간은 에로스를 통해 사랑을 느끼고 배우며 아가페로 나아갑니다. 육체적인 인간이 순수한 사랑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에로스와 아가페가 조화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성욕 때문에 야한 영상을 보며 흥분하는 감정이 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부모님의 거친 손을 잡을 때 느끼는 감정과 더불어 같은 사람 안에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눈을 들여다 볼 때처럼,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가 넘쳐흐를 때에 느끼는 감정과 에너지 모두 같은 사랑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현실적인 사랑의 에너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늘은 땅에서 열리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나 쉽게 우리는 ‘자기연민’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까? 미국에서 만난 어떤 노 신부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나처럼 오래 살다보면 아픈데가 많은데, 요즘은 보는 바와같이 왼쪽 무릎이 아파서 고생이 많고 걷는데도 많이 불편합니다. 이런 나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쉽게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는지 놀랍니다. 그럴 때 나보다 더 고통받는 형제, 자매들은 까맣게 잊고 나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게는 나이 아흔 일곱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흑인이신데다가 병으로 노년에 얼굴을 심하게 얽으셨습니다. 그래서 보기 흉하게 되셨는데 하루는 어머니 집에서 제가 물었지요. “어머니, 그런 모습으로 바깥에 다니기 힘들지 않으세요?”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랬단다. 특히 아이들이 나를 무서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런데 어느날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데 나보다 더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느님께 용서를, 나만 생각하는 죄인에게 베푸는 용서를 청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단다.”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연민이나 이기적인 동기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에로스에만 빠져 있거나 땅에서만 머물려 해서는 아가페로 나아갈 수 없고, 하늘로 오를 수 없고 하느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아는 사랑, 우리 방식으로 하는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 1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참으로 좋은 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때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직장에서 성당에서 혹은 가족 중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를 무시하거나 상처주는 사람, 나를 이용하고 조종하고 나쁘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아예 불가능하고, 그런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이 모든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분께서는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는 그분을 직장이나 식당, 가족들 가운데에서 모른채 하고 무시하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때론 불경한 죄를 지었음에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방법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기 전에, 나아가 사랑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 나의 기대, 나의 계획이 아니라 먼저 그분 사랑 안에 머물면 ‘그분의 기쁨의 우리 안에 있게 되고 또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모습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마침내 목숨마저 주셨습니다. 그분은 어려운 때에 우리와 함께 걸었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하셨고, 어려운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고 모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그분 사랑 안에 머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분 사랑을 따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주는 사람마저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때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그분의 사랑에서 힘을 얻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쉽게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 사랑에서 힘을 얻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마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더 깊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며 그 안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앞으로도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를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